#13 리스본 1 일차-전망대

황금빛으로 물들다

by 카이저 소제

리스본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이다.

오래전에 본 영화라 내용도 가물하고 오직 이미지와 느낌만 남아있다.

그럼에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남자배우와 그의 영화 속 대사 한 문장이다.

그레고리우스 역을 맡았던 제레미 아이언스가 남긴 말, '만약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 않고 교수형을 당했더라면 사람들이 목에 밧줄을 걸고 다니지 않을까...'

십자가는 고난과 희생의 상징이기 전에 그저 잔인하고 고통스런 처형 수단이다.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면 의미가 상징이 되고 나아가 동경 혹은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닐까.

여행 명소라는 것도 어차피 스토리를 입히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이제는 줄거리조차 가물가물한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흔적을 찾아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리스본은 가히 언덕의 도시다.

크지 않은 도시에 모두 7개의 언덕이 있다는데, 언덕이 많은 만큼 이름도 어려운 무수한 전망대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리스본을 걷다 보면 완만하게 시작하면서 점점 가팔라지는 오르막길을 자주 만나게 된다. 오르막의 끝에는 뾰족한 언덕배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평지와 다를 바 없는 삶의 현장이 펼쳐진다.

높다란 고지대에 넓디넓은 성도 있고 수도원도 있고 식당, 서점, 카페 등이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이어져있다.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이곳이 언덕이라는 것조차 잊게 된다.

오르막길 주위로 실핏줄처럼 연결된 좁은 길을 버스와 트램, 택시, 툭툭이가 거침없이 달린다. 오르막 내리막을 슝슝 왕복 운행하는 육상 케이블카 푸니쿨라도 언덕길의 요긴한 교통수단이다.


리스본에 머무는 3일 동안 세 군데의 전망대를 타겟 삼아 둘러보았다.

리스본 1일 차에 둘러본 알칸타라 전망대.

그리고 리스본 3일 차 일정에 들어있었던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와 산타 루치아 전망대.

워낙 전망대가 많으니 여행 책자에 전망대별 점수를 별표로 매겨놓은 것도 있더라만 크게 참고할 건 아닌 듯하다.

전망대는 무엇보다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개인의 취향과 여행 당일 주변 인구밀도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


내게 어느 전망대가 제일 좋았냐고 물어본다면 단연 '알칸타라 전망대'이다. 리스본에서 꼭 가볼 만한 전망대를 꼽으라면 고민 없이 이곳이다. 경치가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관광객들이 크게 붐비지 않아서 편하다.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는 사람에 치여서 사진 한 장 찍기도 힘들었다. 리스본의 붉은 지붕과 파란 테주강이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아름답긴 하지만, 근처 상 조르주 성에서 이미 실컷 본 경치라 싱거운 감이 없잖아 있다.

'산타루치아 전망대'는 포르타스 두솔 전망대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져 있는 곳이다. 경치도 비슷한데 굳이 다른 이름을 붙여서 관광객들 정신 사납게 하나 싶다. 단, 산타루치아 전망대는 전망대 난간의 벽을 장식한 아줄레주 타일 공예가 먼저 눈길을 끈다. 근데 아줄레주 타일도 자주 보면 식상하다. 공동 목욕탕 서늘한 파란색 타일 느낌도 없잖아 있는 걸.

산타루치아 전망대에서는 채 5분도 머무르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어딘가에서 풍기는 박제된 소변냄새와 전망대 난간 벽에 끼적여 놓은 여행객 혐오낙서로 기분이 확 상했기 때문이다. 상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전망대 노천카페에서 모히또와 레모네이드를 주문해서 주욱 들이켰다.

이래저래 알칸타라 전망대 압승!


리스본 1일 차에 작정하고 간 알칸타라 전망대.

리스본행 야간열차 촬영지였기 때문에 꼭 가보고 싶었다. 솔직히 영화의 어느 장면에서 이 전망대가 나오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아 브라질레이라 카페- 카르무 수도원- 알칸타라 전망대로 길이 이어지니 동선 짜기도 좋았다.

카페에서 당충전을 한 후 기세등등하게 갔던 카르무 수도원. 근데 입장불가였다.

5시 30분경 갔더니 6시에 문을 닫아서 입장이 안된다고.

수도원 정문 앞을 거닐며 아쉬움을 달랬다.

정문 앞 넓지 않은 공간에는 작은 분수를 끼고 있는 광장이 있다. 크고 작은 광장들을 자주 만나서일까.

리스본에 도착한 지 불과 반나절만에 대충 광장이 있을만한 곳이 가늠이 된다.

광장에서 노닥이지 않고 바로 알칸타라 전망대로 향했다.

알칸타라 전망대는 늦은 저녁이나 밤에는 가지 말라는 말을 들었었다. 안전하긴 하지만 다른 곳에 비해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라고 했던 듯하다. 해가 지기 전이지만 공연히 마음이 조급해서 걸음을 서둘렀다.


몇 분 걷지도 않았는데 흥겨운 음악소리가 들리는 야시장 같은 곳이 나온다. 빛을 발하는 작은 알전구를 조롱조롱 매달고 있는 노점들이 열 지어 있고, 영화 '용가리'에 나올법한 공룡탈과 옷을 뒤집어쓴 사람이 노점 앞에서 호객을 한다.

카르무 수도원에서 전망대까지 가는 길이 생각보다 지척이라 놀라울 지경. 정말 리스본은 뚜벅이 여행객들에게는 최상의 여행지가 아닌가.


야시장을 지나 몇 걸음 지나치니 말 그대로 앞이 탁 트인 전망대가 나온다.

그리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

리스본 여행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으라면 알칸타라 전망대에서 본 저녁풍경을 빼놓을 수 없다.

비가 그친 흐린 저녁이라 노을은 언감생심 기대도 안 하고 있었다. 저녁 볕도 없는 그늘진 날씨에 어떻게 저런 황금빛 노을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사람들도 별로 없는 조용하고 널찍한 전망대에서 말을 잃고 다만 아래에 펼쳐진 리스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계단으로 이어진 전망대 바로 아래는 산책하기 좋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어디 하나 걸리는 곳 없이 나지막한 건물들로 펼쳐진 도시는 아름다웠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도심은 보통 네온사인이 빛나는 밤이 되어야 비로소 화려해진다. 이른바 야경.

분칠 한 것처럼 도심을 반짝이게 하는 야경이 아닌데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붉은 지붕과 어우러진 빛나는 노을은 장관이었다.

리스본, 그 이름값을 이렇게 하는구나.

영화 촬영지라는 명성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빛이 난다.


도시의 오른쪽 저 멀리 가장 높다란 곳에 작은 레고블록 성벽 같은 것이 보인다.

장난감처럼 보이는 성벽에는 구색 맞추듯이 앙증맞은 깃발도 꽂혀있다.

알고 보니 바로 알파마 지구에 있는 상 조르주 성 성벽이었다.

이곳은 리스본 3일 차에 파란만장한 여정으로 들르게 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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