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이동능력이 생겼어요

아임 유어 점퍼

by 톨슈

매번 다른 장소를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 익숙한 풍경에서만 평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풍경을 마주할 때에 속의 피가 끓고, 그제야 살아있다는 실감이 짜르르르 흘러내려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나는 매번 기도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내가 원하는 새로운 곳으로 이동해 있기를. 내가 바로, 순간이동의 능력을 가질 수 있기를. 얼마나 많은 곳에 가서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을까? 이 발로 모든 지구의 구석구석을 다 밟고서 무지개 같은 사람이 되고 말테야! 라고 스무살의 나는 일기장에 적었었다.


30대의 나에게 묻는다.

이제 진짜로 영화처럼 내가 순간이동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마음이 울렁였다. 그것은 기분 좋음과 동시에 강력한 역겨움을 동반했다. 좋지만 이질감이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마냥 환영하기만은 불안한 감정이었다. 빛보다 빠른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와 같은 심정일지 모른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범위를 넘어서는 속도의 느낌일 텐데. 순간이동이라는 것이, 과연 내가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듯이 그렇게 어지럽지 않게 그저 이동이 되기는 할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그 행위를 하면서 내 생명을 갉아먹지 않을 수 있을까. 긁힌 내 수명들은 대체 어디로 넘어가게 되는 것일까. 이론 따위 잘 모르겠다. 어차피 세상은 설명할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져있지 않으니. 그렇지만 불안감이 엄습할 것만 같다. 세상은 말도 안 되는 행운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위기감. 순간 이동 능력을 가진 대신, 신은 내게서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너무 기브 앤 테이크가 넘실거리는 한국사회에서 자라왔는가, 별 생각이 다 든다. 순간 이동자를 칭하는 <점퍼>라는 영화에서는 순간이동 능력을 이용해 점퍼가 해외로 돌아다니고, 돈을 훔치며 행복을 만끽하던 순간, 그를 없애려는 존재가 나타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에서도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동쪽에 빛이 있다면 서쪽에는 어둠이 있는 것이 인생이니까.



그렇다면 고난을 감내하고도 순간이동을 통해서 내가 얻고 싶은 바가 있는지를 고심한다. 나의 결핍과 절실함, 혹은 유치한 소망과 바람은 무엇일까. 내가 순간이동 능력을 가졌을 때 하고 싶은 일들은 무엇일까.



첫째, 고급지고 확고한 취향을 가진 자가 되고 싶다. 어렸을 적부터 세상의 좋은 것을 많이 본 분명한 취향은, 늘 탐나는 대상이었다. 부유함으로 인해 가질 수 있는 특권. 마음껏 흡수에 돈을 쓰고 시간을 써서 다양한 예술을 접하고 싶었다. 풍족한 재력으로 한가득 예술을 향유할 기회를 가지던 사람들이 부러웠다. 악기를 전공해서 빛나는 무대에 서거나, 빛나는 미술품을 내 눈앞에서 비교하며 감상해보고 싶었다. 여유로운 집안 환경을 바탕으로 유학을 하고 예술을 하는 그들이 나에게는 한없이 반짝여 보였다. 그 빛을 점퍼가 되면 훔쳐올 수 있으리라. 나는 매일 오르세 미술관에 갈 수 있겠고, 유명한 클래식 공연을 훔쳐 들을 수 있겠지. 어릴 때부터 벅차게 차오르는 자존감으로 가득 찰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고 싶은 것들을 원하는 만큼, 보고 들을 수는 있겠지. 순간이동 능력을 이용, 혹은 악용해 번 돈으로는 - 예술 강의를 맘껏 사고 예술가를 후원할 테다.



둘째. 시골과 도시, 두 곳에서 동시에 살고 싶다. 도시에 사냐, 시골에 사냐 하는 화두는 어릴 적 도시 쥐와 시골쥐를 읽으면서부터 시작되었었다. 소박하고 사람이 없는 자연에도 살고 싶고, 다채로운 도시에도 살고 싶은 두 가지 마음 중 하나를 선택하려는 잔혹한 시도는 이삼십 대 내내 나를 괴롭히던 단골 상상 주제였다. 나중에 책방 주인이 꿈인 나는 강원도 영월에 책방을 열까, 서울의 핫한 골목에 책방을 열까 혼자서 매일 고민한다. 그 즐겁고도 괴로운 고민을 멈출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도시의 변화와 분주함을 사랑한다. 고층 빌딩과 북적이는 사람들마저도 감탄의 대상이다. 그런데 또 서울을 벗어나서 시골에 가면 그것대로 좋아 죽겠다. 모든 걸 내려놓고 그저 안온할 수 있다. 아무도 없는 산속의 소리를 정말 좋아하는데, 산과 서울의 힙한 동네들을 하루에도 두어 번씩 왔다 갔다 하며 살면 어떨까 싶다. 연희동 뒤쪽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북 토크에 복작이며 참여하고, 유명 와인바를 격파한 뒤에는, 나만의 시골 한옥에서 별을 보며 잠드는 삶. 유명 유튜버에게 직접 강의를 듣는 행사에 매일 참여하다가도, 시골 뒤뜰의 토마토에게 퇴비를 주는 삶. 매일 자라나는 초록 풍경의 고귀함과 도시의 이지적인 문화를 함께 향유해나가는 삶. 상상만 해도 짜릿하고 재밌겠다. 무엇도 놓기 힘든 욕심쟁이에게 딱인 삶일 것이다.



셋째로 하고 싶은 건, 음, 사실 좀 괴롭히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영혼을 마음껏 이용하고 막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시원한 펀치를 주고 싶다. 그런데 늘 악당이 나오는 영화를 볼 때마다 생각하지만, 악당을 그냥 죽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악랄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나는 지속적인 사소한 괴롭힘이야말로 인간을 괴롭게 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신뢰를 무너트리고 싶다. 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가 신뢰라고 생각하는데, 신뢰 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나. 그 사람이 중요한 서류를 놓아두었다고 하는데 회의실 책상 위 서류가 사라지고, 기념일에 가족을 위해 사 둔 선물이 느닷없이 없어진다고 치자. 동료와 가족 간의 작은 약속들이 조용하고 지속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괴롭히는 일은 때로 충분할지 모른다. 아니,그야말로 점퍼라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할 수 있을텐데 뭘 훔쳐서 골탕 먹일 거면, 아예 현대판 홍길동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나쁜 사람들의 금은보화를 훔쳐서 열심히 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책상에 놓아주어볼까.



마지막으로 역시, 점퍼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마음껏 여행하고 마음껏 이동하는 것일 텐데. 소소히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은 돈 걱정 없는 여행과 맛집 탐방일지 모른다. 뭐, 현생에서도 나름대로 만족하며 각종 탐방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행을 맘껏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 사실 벅차오르긴 한다. 그런데 말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아니 되는 법이다. 일탈도 그러할 것이고 여행도 그러할 터이다. 정말로 손쉽게 매일 여행이 가능하다면 나는 그것을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남들과 다르게 비행기를 타지 않는 삶을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긴시간 기다리고 준비하는 설렘 없이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여행이 달콤하기만 할까. 여행이 반짝이는만큼, 여행준비의 시간과 이동의 순간들도 반짝이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렸을 적에는 친구들과 순간이동이나 투명인간 같은 주제가 나올때면,늘 빠지지 않고 이성의 목욕탕에 가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었다. 보고싶은건 웬만큼 볼 수 있을 넷플릭스 같은 채널의 힘인가, 아니면 정말 많이 커버려서인가, 이제는 그 쪽은 정말이지 됐다. 오히려 환상을 지키려면 양쪽 모두에게 권하지 않는 쪽이 맞겠지?(웃음)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이 초능력을 두 팔 벌려서 엄청나게 갖고 싶은지는 헷갈린다. 꽤나 많은 걱정과 고난이 수반되는 결정인 것이다. 그중 가장 큰 걱정은 아무래도 나만 특별한 능력을 가진다면, 보통과 달라서 때로는 많이 외로울 것만 같다.


순간이동 초능력자가 될 그런 기회가 온다면, 뇌로는 정중히 사양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제안이 오면 단칼에 거절할 자신은 또 없다. 난 우유부단 두부 같은 사람이니까, 하하. 그리고

남자를 만날 때도 그랬고, 인생의 중대한 선택기로에서도 늘 안전보다는 도전을 선택해 온 타입의 인간이었다. 불구덩이로 빠질 줄 알면서도, 초능력의 사자가 내게 윙크를 한다면, 그린라이트를 보낼지도 모르지. 애초에 다가오는 초록빛에 달려가 보지 않은 적은 없다.





순간 이동자가 된다면 재미도 있고 이루고 싶은 것들도 있지만, 역시 보통 사람들과 공감하고 사람답게 살고 싶은 소망도 내 몸안에 강력히 일고 있음을 느낀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과 고인 공간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남기를 소망한다. 그 어느 날, 놓친 버스를 기다리며 멍하니 쳐다본 흔들리는 민들레와 하늘. 그 아름다움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 보고싶은 누군가를 만날 수 없는 상황에 간절히 그리워하는 애타는 마음도 때로는 달콤하다.






급작스럽게 초능력을 가진 히어로가 될 기회는, 언제 어느 순간 닥칠지 모른다.


다들 언제 올 지 모를 그때를 위하여,

잠이 안 오는 이 밤, 한 번쯤은 상상해 둘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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