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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톨슈 Oct 24. 2021

02. 빨랫줄에 말리는 마음

예쁜 마당을 가진 숙소, 영월의 든해에서

 

 한옥 처마 끝으로 물방울이 똑 똑 떨어진다. 커다란 아궁이 두 개가 귀엽게 자리하고 있는 야외 부엌 옆으로 나무로 만든 정자가 있다. 정자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자면, 정겨운 소리들이 들려온다. 글자 그래도 정말 꼭-끼오- 하고 우는 닭들의 소리에 화답하듯 여러 종류의 새들이 지저귄다. 짹짹 일 때도 있고 뾱뾱일 때도 있고 푱푱일 때도 있고 짹찌르르 일 때도 있다. 닭들과 새들의 쉬지 않고 들려오는 오케스트라를 듣고 있자면 자꾸만 멍하니 넋을 놓고 자연을 바라보고 있게 된다. 그 순간이 좋다. 얼굴 근육은 편안히 쉬고 있지만 마음의 근육은 좋아서 씰룩씰룩 미소를 짓는다. 


 눈앞에는 빨갛게 익은 고추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텃밭과, 늦가을 날씨가 추워 연두 잎사귀 사이로 차가운 물방울들을 수줍게 머금은 상추들이 보인다. 어디선가 나타난 고양이가 냥 하는 소리를 내며 살금살금 밭을 지나 가까이 곁에 다가왔다가, 내가 움직일라 치면 또 놀라서 겁이 나 장독대 뒤로 숨는다. 완전히 안 보이게 몸을 다 숨기거나 어디 멀리로 도망가지는 않는다. 거참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아이인가 보다. 귀여워서 못살겠네. 도시에 사는 나에게는 이 마당과 고양이 너의 모습이 그저 신기하고 고귀하듯 너에게는 시골에서 보기 힘든 비니에 레깅스를 입고 앉아있는 내가 재밌겠지? 싶다. 고양이를 보면 늘 발바닥을 만질 때의 촉감이 떠올라서 온몸이 간질간질해진다.




 평창과 영월의 사이, 보이는 것은 산과 잔디밭뿐인 이곳에서, 나는 글을 쓰고 있다. 의외로 잘 닦아놓은 포장도로 길이 민박집 앞으로 펼쳐져 있긴 하지만, 이른 아침에는 차가 다니지를 않는다. 콘크리트 도로 바닥 한 중간에 영화처럼 누워나 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산골이라서 아침저녁으로는 추위가 제법 매섭다. 정자에 앉아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자니 손이 시려오지만, 따스한 우엉차 한잔이 곁에 있어서 견딜만하다. 요즘 나의 몸과 자연에 좋은 먹거리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데 우엉이나 메밀차 같이 자연이 내어준 잎이나 뿌리로 만든 차들을 마시고 있으면, 감사한 마음이 계속 든다. 차가 없었더라면 식과 식 사이 마음의 공허함을 어떻게 채울 수 있었을까? 우엉차의 따뜻한 기운이 그저 다정하다. 조금 추워도 방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방 안의 온돌은 근심도 다 녹여버릴 정도로 뜨끈뜨끈하지만, 그렇다고 이 아름다운 가을 하늘과 공기를 놓칠 수가 없다. 


 요즘은 정말 좋은 순간을 마주하면, 이 순간이 또 언제 다시 올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참 쉽지가 않다. 당연하게 햇살과 바람과 여유를 누릴 수 있던 어린 시절 같은 시간을 매일 누리고 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이 소중하고 애틋해서 일 분 일 초 놓칠 수 없이 새기고 싶다. 시간이 소중하다고 느낄수록, 내가 가엽다고 느낄수록, 시간을 모르는 삶을 살고 싶다. 시계를 안 볼 수 있는 오늘이 그래서 더욱이 행복하다. 





 숙소 마당 뒤편에는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빨랫줄이 걸려있다. 알록달록한 빨래집게들. 왜 이렇게 정겨운지 모르겠다. 도시의 아파트에 건조기를 들여서 훨씬 더 편리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구 발을 움직여서 빨래를 밟고, 그것들을 있는 힘껏 탁탁 털어서 햇빛 아래 집게로 널고 싶은 충동이 인다. 아침 5시 반부터 울어대는 닭들 덕에 글을 한참 쓰고 아침운동도 마무리 한 지금도 고작 7시 반. 아침 댓바람부터 빨래한다고 소란스럽게 굴기에는 고이 자고 있는 동거인에게 미안하니까, 어제 해먹 위에 올려놓고 자버려 살짝 물기를 머금은 책들을 말려보자고 결심한다. 여행 중이라서 가벼운 책 위주로 들고 왔더니 얇은 두께의 시집과 에세이들이 집게 하나도에 다소곳히 집힌다. 좀 두터운 소설책 하나는 집게 두 개를 사용했더니 딱 귀엽게 걸렸다. 


 바람이 불자 빨랫줄이 흔들리고 책들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히히. 행복해서 웃음이 나온다. 책들을 빨랫줄에 걸면 이렇게나 예뻐요! 현대미술 작품 같아요! 하고 사방팔방 사진을 보내 자랑하고 싶다. 남이 쓴 애정 하는 책들을 이렇게 걸어 보는 것만으로도 아침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른데, 내가 쓴 책들을 가지런히 빨랫줄에 걸어 전시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래서 나의 일기장도 걸어본다. 일기도 어찌 보면 나만의 출판물이자 책일 것이다. 직접 연필이나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여행의 단상들과 스케치한 그림들이 넘실거린다. 나라는 사람을 기록하는 일은 이따금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털썩 잔디 바닥에 주저앉아서 흔들리는 일기장과 책들을 바라본다. 별 것 아닌 생각들도 가지런히 노트나 책에 적히면 무엇이 되듯이, 평범한 나도 이 자리에 그저 존재해서 무엇으로 남을 수 있을 듯하다. 살면서 아주 거창한 일들을 이뤄야만 삶의 의미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나는 이 감사한 햇빛을 경험하러, 바람을 느끼러, 세상을 보러, 이 지구에 태어났다. 존재만으로 무엇이 되는 세상에 살고 싶다. 존재하니까 먹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을 만큼 내 힘으로 일을 하고 딱 필요한 만큼만 소비하고 먹는다. 글을 쓴다. 그것만으로 나는 마음껏 충만 해질 테고 내가 남긴 경험의 기록들은 또 누군가에게 새로운 경험으로 향하는 하나의 문이 되거나, 감성을 충족시키는 열쇠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경험하러 태어났다. 정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는 시골의 아침이다. 해가 빛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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