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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톨슈 Oct 24. 2021

03. 장칼국수에 소주 한 잔

시골 작은 식당의 맛


 석항역 앞 시골길을 무작정 걸었다. 역 앞으로 열고 있는 가게가 서너 개쯤 보인다. 시골 가게들의 메뉴판에는 사실상 거의 모든 메뉴가 다 쓰여 있다. 삼겹살, 두루치기, 백반, 칼국수, 순댓국, 김치찌개... 그래서 크게 고민 없이 들어갈 수 있기에 오히려 나같이 결정장애가 있는 여행객은 행복하다. 


 슈퍼를 지난다. 요즘 도시에도 레트로 콘셉트가 유행이다. 서울에도 옛 감성이 담긴 커다란 궁서체의 색색깔 간판과 양은 테이블 등이 보이긴 하지만 그건 흉내일 따름이었다. 진짜 시골의 슈퍼를 만나니까 정말 때깔이 다르게 세월이 느껴지고 정겹다. 몇 번의 작고 큰 보수를 거치고 살아남은 듯한 오래된 나무 기둥과 많이 해진 간판, 그 밑에 평상에는 정말 그림처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막걸리를 마시고 계신다. 조명은 바랜 듯 노랗고 작은 슈퍼 내부 안에는 사실 몇 가지 과자도 없지만 소박한 정갈함이 느껴진다. 요즘은 지나치게 많은 선택지가 있는 도시의 삶이 힘들 때도 있어서, 식당이 작은 것도, 슈퍼의 과자 개수가 적은 것도 행복하다. 슈퍼에는 당연히 도시처럼 오픈 클로즈 시간도 쓰여 있지 않고, 어떤 안내문도 없다. 칼같이 각박하지 않게 운영하실 형태가 떠올라 마음이 풀린다. 문은 수동으로 옆으로 드르륵 밀어 열리는 문. 지나가며 보는데도 막걸리 마시던 할머니들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서 시선이 갔었다. 약속이나 하신 듯한 비슷한 무늬의 몸빼바지 옆으로 떡과 과자, 쌓인 막걸리 병들이 놓여 있었다. 


아, 나도 평상에서 막걸리 마시고 싶다! 엊그제 평상이 있는 한옥 숙소를 잡았다가 새벽녘 닭소리에 놀란 나였기에 오늘은 늦잠을 자려고 깨끗한 현대식 기차 숙소를 잡았는데, 숙소 앞으로 이런 풍경이 펼쳐지는 것은 반칙이다. 조용히 숙소 안에서 노트북을 켜고 글 작업을 하려던 마음이 흔들린다. 이렇게 시골 풍경이 그윽한데 평상에서 나도 술 한잔 마셔야 하는 것 아닌가? 할머니들 앞에서 도시 아가씨 스토리 좀 풀면서 막걸리를 얻어 마셔볼까, 고민하다가 너무 얇게 입고 나온 나의 외투와 작업할 것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여행이 며칠이나 남았는데, 흥 내다가 감기 걸리면 안 되지, 일도 해야지- 하고 슈퍼 바로 옆 백반집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음주에의 유혹! 일단, 1단계 고비는 넘겼네.






 들어선 식당 이름은 보성 식당. 00 식당이라고 주로 두 글자로 앞글자를 붙이는 것은 누가 시작하고, 또 누가 그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인지 가끔은 매우 신기하다. 이런 이름들은 기억력 약한 나에게는 나중에 보석 식당이나 유성 식당 같은 비슷한 이름들과 헷갈릴 것만 같다. 그래도 이름이 정겹다. 주인님이나 주인님 가족분의 성함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더욱 소중할 테지. 


 들어가서 메뉴를 보니 칼국수와 장칼국수, 만둣국이 눈에 밟힌다. 짧은 일이 분여의 시간 동안 나는 열정적으로 메뉴를 고민한다. 메뉴를 정할 때는 뇌가 열 배속으로 도는 기분이다. 결정장애 성분이 혼합되어 있는 나의 유전자를 안타까워하면서, 결단력 있게 가보는 거야! 후회하지 말자! 라며 혼자서 비장한 결심을 한다. 칼국수도 먹고 싶고 만두도 먹고 싶으니 난감하다. 두 개를 시킬까 고민하다가, 음식을 남기지 않는 삶을 실천하기로 한 지난주의 나를 떠올리며 힘겹게 하나를 고른다. 그래, 맵찔이지만 장칼국수는 서울에 많지 않은 음식이니 장칼국수로 고! 장이 들어가 뻘겋게 걸쭉한 칼국수를 상상하니 즐겁다.


 칼국수가 나왔다. 칼국수 하나를 시켰는데 반찬 여섯 개를 달고 나오는 시골 인심에 감탄하면서, 국물을 한 스푼 떠 들이킨다. 생각보다 매운 기운이 혀를 감싼다. 엄청 칼칼하다! 아저씨 같은 어허- 크으- 소리가 절로 나온다. 국물 한 입 떠먹었을 뿐이나 입에 매운 침이 계속 고이는 음식이다. 달래 보려고 깍두기를 입에 넣었더니, 아삭하고 잘 익어서 엄청 시원한 맛이 나는데도 뒷맛이 엄청 쏘는 매운 고춧가루가 들어간 깍두기이다. 크하- 매운 걸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했던가, 매운데도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힘이 돋는 기분이 난다. 


 부드러운 면발을 한 젓가락 가득 잡아서 호로록 빨아 당긴다. 입술 위아래로 벌건 양념 국물이 묻어나는데, 감칠맛이 싹 돈다.  도저히 안 되겠다, 항복! 이건 소주와 먹어야 하는 궁합이다. 사이다도 아니요, 단무지도 아니요, 물도 아니요. 오직 차가운 소주만이 이 입술의 얼얼함과 속의 뜨끈함을 식혀줄 수 있다. 적어도 오늘 술을 안 마시려고 한 차례 시도는 해보았다는 혼자만의 핑계를 중얼거리며, 결국 소주를 딴다. 


     따락- 소주병 뚜껑이 돌아갈 때 마음의 빗장도 스르륵 돌아 풀린다.





그때 옆자리에 새로 들어오신 할머니가 외치신다. “아주메- 여기 칼만두 하나요! “ 아뿔싸, 짬짜면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내가 칼만두를 잊다니!!! 너무 슬프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먹을 수 있었는데, 나는 무엇을 위해 그리 고뇌해서 하나를 골랐나. 아, 슬프도다. 진심으로 슬프도다. 아까 낮에 청령포 유배지를 걸었을 때처럼 쓸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스친다. 아무래도 소주 반 병만으로는 이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다. 에라 모르겠다, 한 잔을 더 따른다. 기왕지사 술이 들어갔으니 완술하고 술의 힘으로 또 수다판을 벌여야겠다.


“어머님, 저는 영월에서 일주일 살러 왔어요! 여기 동네가 진짜 좋네요~~ 이 칼국수도 저엉말~~ 맛있고요! 이 동네는 또 어떤 집이 맛있어요? 옆 중국집 가보셨어요? ”



지난 편에도 이야기했듯 나는 여행만 오면 너스레가 느는데 정 많은 시골의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는 나보다 더하게 수다로 맞대응을 해주신다. 이 동네 맛집정보 다 알고 가겠네. 내일 먹을 좋은 옹심이 집도 추천을 받는다. 




 칼국수와 반찬을 싹싹 비우고 숙소로 콧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돌아 간다.  밤하늘에 별이 일곱 개쯤 반짝반짝 빛난다. 역마을이라서인지 멈춰있는 기차 위로 보이는 달과 별의 콜라보는 더욱 아름답다. 오늘은 보름달이 떴네. 장칼국수와 소주에 풀린 마음에 달이 더 환하고 예뻐 보인다. 다음에 이 식당에 또 와야지. 


참 맛있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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