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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톨슈 Oct 24. 2021

09. 얼떨결에, 막걸리

영월과 사랑에 빠지던 밤

 영월 일주일 살기를 결심하고 영월에 왔던 첫날, 어디를 돌아볼까 호기롭게 관광센터에 들러 정보를 수집하던 찰나, 갑자기 몸에 한기가 들고 극심한 운전의 피로가 몰려왔다. 아무래도 급작스럽게 날이 추워진 탓이 컸다. 아직 가을 옷을 입고 있는 내게 느닷없이 불어온 한파는 어깨를 움츠리게 했고, 그것은 곧 마음에도 찬바람이 스민다는 뜻이었다.


 하필 왜 내가 온 날짜에 한파가 왔담, 일부러 좋은 가을 날을 골라서 여행을 잡아두었는데 왜 이렇게 나는 운이 없담? 몸이 피곤하니까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이 차올랐다. 누구보다 따스한 햇살 받으며 잘 놀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게 쉬다 가야지, 라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또 마음을 경직시키고 경쟁적인 사고를 하게 된 것은 아닌가 스스로에게 경계심이 들었다. 진짜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그런 것인지, 나란 인간이 애초에 그리 생겨먹은 것인지, 그저 쉬라고 해도 맨 정신에는 너무 너무 열심히 잘 쉬려고 하는 게 문제인 것 같았다.


 이런 때에는 나만의 약이 있지! 그래, 맛있는 술로 마음을 좀 누그러트려 봐야지!






 관광센터 안에는 내점해 있는 영월 토산품들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옆집 언니 같은 친근한 언니가 관광센터의 전시들이 마음에 들었냐며 상품을 추천해주러 다가왔다. 사무적이거나 정해진 멘트가 아닌 친근함과 서글함이 묻어있는 말투였다. 모르는 사람이 웃으면서 나의 마음을 물어 줄 때, 나는 마음이 달아올라 기뻐진다. 나는 질문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또 단어를 잘 골라 예쁘게 포장해서 말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 다르고 어 다른 맛을 아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질문의 작은 뉘앙스에서도 그런 성정이 느껴졌다. 나는 전시는 흥미로웠지만 추위에 야외 정원과 카페테라스를 잘 누리지 못해서 조금은 아쉬웠다고, 대답했다. 오늘날이 너무 추워서 아무래도 술로 마음을 덥혀야겠다고 웃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들은 직원분께서 영월의 술을 추천해 주셨다. <얼떨결에>라는 이름을 가진 막걸리였다. 이름이 어쩌다 이렇게 지어졌나, 근데 정말 얼떨결에 이 술을 잡고 만다. 색이 예쁘다. 핑크우유색깔이랄까? 맛이 궁금해서 참지 못하고 관광센터 앞의 공원 의자에 걸터앉아 텀블러에 한 모금을 따른다. 캬아- 맛을 보니 단맛과 막걸리 특유의 텁텁한 맛의 조화가 아주 죽여준다.


 꿀꺽꿀꺽 마시다가 잔디로 떨어지고 만 그 한 방울이 아쉬웠다. 이거 너무 맛있잖아? 바로 들어가서 한 병을 더 샀다. 관광지를 하나쯤 더 들를까 하다가, 바로 잡아둔 펜션으로 향했다. 가방에서 목도리랑 패딩을 꺼내 입고 펜션 테라스에서 막걸리 마셔야지!!! 서둘러 차를 몰았다.


 펜션에 도착하니 배정받은 방은 이층이었고, 방에서 이어진 테라스로 끝없는 논밭과 산이 펼쳐져 있었다. 슬슬 노을이 지려고 하는 시간이었다. 이런 최고의 풍경 안주가 어딨담! 서둘러 펜션에 있는 cass유리잔에 막걸리를 담는다. 양은 주전자랑 대접이 있으면 환상이겠지만, 잠깐 묶는 숙소에서 이것저것 따지며 찾을 수가 없다. 유리잔 한 잔 가득 핑크빛이 가득 차니 이 컵이 제격이었다 싶다. 막걸리에 뭘 넣었길래 이렇게 예쁜 색깔이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맛이 너무 좋았으니까 유리잔에 가득 따라서 원샷을 해본다. 차가운 알코올이 쭈욱 들어가니 몸이 부르르 떨린다. 진짜 시원-하다. 





 두 잔을 연거푸 들이켜자 몸에 따뜻한 기운이 올라온다. 노을이 노랑 빨강에서 주황 갈색으로 조금 더 변한 듯하다. 여행 와서 맛있는 술을 첫날부터 만나다니, 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쏘냐. 펜션 주인님과 이런저런 간단한 수다를 떨고 안부를 주고받는다. 막걸리는 살면서 수도 없이 마셔보았지만, 일주일 살기를 하러 와서 지는 해를 보면서 마시는 막걸리는 더욱 남달랐다.




막걸리 한 잔에 다짐과, 막걸리 한 잔에 내려놓음과, 막걸리 한 잔에 영월의 별과, 막걸리 또 한잔에 기대와 설렘이 담긴다. 눈꺼플이 조금씩 내려갈수록 입꼬리는 올라가고, 영월의 달이 밝아진다. 새소리가 들린다.



 얼떨결에, 영월과 사랑을 시작하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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