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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구름 Aug 15. 2021

소녀의 성냥

'성냥팔이 소녀' 재구성 공모작 다시 쓰는 안데르센 명작

 조금 열려 있는 방문 틈 사이로 어슴푸레 빛이 들어왔다. 어디선가 어렴풋이 들리는 그릇 달그락 거리는 소리, 의자를 끌어 옮기는 소리가 났다. 소녀가 눈을 떴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정신을 차리려니, 노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들어오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정신이 좀 드니? 바깥 날씨가 너무 추운데 우리 집 골목에서 잠들어 있길래 데리고 들어왔단다. 우리 집에 신부님이 오셨거든. 신부님 문 열어드리러 갔다가 널 발견했어. 놀라지 말고, 천천히 나와서 우선 우리랑 따뜻한 음식 좀 같이 먹으련?” 


 소녀는 성냥을 켰을 때 봤던 할머니를 다시 본 것 마냥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괜찮아.. 음식을 좀 먹고 나면 더 괜찮아질 거야. 천천히 나오렴. 기다릴게.” 


 따뜻한 목소리의 아주머니는 소녀의 등을 토닥여주고, 갈아입을 옷도 내어주었다. 허리를 숙여 소녀와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어주고 나갔다. 소녀는 어리둥절했다. 어서 성냥을 팔아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아주머니와 추위를 피할 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 그저 시간이 멈춰줬으면 싶었다. 집에 가봐야 폭력을 휘두를 아버지뿐이니. 


 방 밖으로 조심스레 나오니 또래로 보이는 어린아이와 아주머니, 아저씨, 그리고 동네 성당의 신부님이 보였다. 식탁 위에는 아까 보았던 사과와 자두로 속을 채워 구운 거위와 따뜻한 수프, 직접 구운 고구마 파이,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가는 맛깔스러운 음식이 있었다. 

 아주머니가 의자를 꺼내 소녀가 앉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아주머니를 비롯해 이 가족은 소녀에게 이따금씩 자신 앞에 있는 음식을 덜어 접시에 올려줄 뿐 소녀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더 묻지 않았다. 그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웃어주고, 소녀가 천천히 식사할 수 있도록 속도를 맞춰주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신부님이 입을 열었다. 


 “기도를 해도 당장 잘 이뤄지지 않아 답답하게 느낄 때가 있죠. 가만히 기도만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 들어주시기는 어려우니까요." 


차를 마시던 가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부님이 소녀 쪽으로 몸을 돌려 말했다. 


 "음... 소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요?"


 이 식탁에서 들은 첫 번째 질문이었다. 바로 대답하기 어려웠지만, 소녀는 따뜻한 식사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용기 내어 말했다. 


 “... 저는... 저는 성냥을... 이 동네에서... 성냥을 팔고 있어요.” 

@pixabay


용기 내어 말해 준 소녀를 바라보며 신부님은 다시 천천히 물었다. 

 “성냥을 팔기에 요즘 날씨가 너무 춥죠, 힘들고, 어렵지요?” 


신부님의 물음에 자신의 딱한 처지가 다시 떠오른 소녀는 울먹이며 겨우 대답했다. 

“.... 네...”  

 “그럼, 성냥을 파는 것 말고, 성냥으로 소녀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나요?” 

머뭇거리던 소녀는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는... 전... 그저 성냥을 켜고 끄는 것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소녀의 흐느낌은 점점 커졌다. 소녀는 서러웠다. 학교에 다니며 사랑받고 자란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성냥 켜는 일밖에 없다는 것이 서운하고 속상했다. 신부님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소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럼, 성냥을 켜고 끄는 것만 합시다.” 

 “네?” 

 “그래요, 성냥을 켜는 것을 잘한다고 했으니, 잘하는 것만 해봅시다. 제가 아주 조금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겠어요.” 


 소녀는 신부님의 뜻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지막 희망으로 신부님의 말을 믿기로 한다. 


 “오늘은 성당 수녀님들이 계신 곳에 데려다 줄게요. 일단 하루 푹 자고 몸을 좀 더 녹이고, 내일 아침 맛있는 식사도 하고, 다시 만나요. 갖고 다니는 성냥은 꼭 챙겨 오고요.” 

 “하지만, 저희 아버지가...” 

 “아버지께는 제가 얘기를 해두겠어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내일 아침 수녀님들과 식사를 마친 후 천천히 오세요.” 

 “네.. 신부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녀는 그동안 성냥을 사준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뱉었던 인사를 하진 않았다. 소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날 밤, 수녀님들이 머무는 방에서 안전하고 따뜻하게 머문 소녀는 신부님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성당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저녁에 이어 아침까지 든든하게 먹어서 안도가 되었지만 속은 조금 더부룩했다. 하지만 발걸음만큼은 가벼웠다. 앞으로 무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피해 두 끼 식사와 하룻밤 따뜻하게 잠을 잔 것만으로도 고된 피로와 서러움이 조금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어제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 


‘성냥을 켜고 끄는 것만 합시다.’ 


 걸으며 생각해보니, 여기저기 성냥을 팔러 다니며 성냥을 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횟수는 소녀의 나이보다 많았다. '그래. 내가 성냥 하나는 한 번에 잘 켜지.' 성당에 도착할 무렵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신부님은 성당 앞뜰에 이미 나와 계셨다. 


성당@꽃구름


“잘 잤나요?” 


“네.. 안녕하세요. 신부님도 잘 주무셨나요?” 


“네, 덕분에요. 오늘은 어제 말한 것처럼 절 도와주면 됩니다. 평소 하던 대로 성냥 켜는 것만 해보겠어요? 다만, 성냥을 켜고 끌 때 휴대전화로 녹화할 겁니다. 그저 화면에는 소녀가 켠 성냥만 나올 뿐이에요. 그리고, 한 번에 잘 켜야 한다는 부담감도 갖지 마세요. 다시 찍으면 되니까요.” 


 신부님은 성냥을 켜는 소리로 ASMR 힐링 영상을 만들 생각이었다. 기도하러 성당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집에서 집중이 잘 되는 성냥불 영상을 만들려고 했다. 신부님은 소녀에게 제안했다. 여기 매일 와서 성냥을 켜고 끄는 것을 녹화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면, 당분간 성당에서 먹고 잘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소녀는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루 종일 성냥을 팔러 다녀봐야 끼니 때우기도 힘든 여정이었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피할 수만 있다면.. 하루에 밥 한 끼 제대로 먹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에 그저 크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성냥을 켜고 끄는 것은 사실 신부님도, 그 누구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신부님은 소녀에게 잘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배려는 성냥 영상을 보며 집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pixabay



 성당 신부님의 아이디어로 ‘소녀의 성냥’ 채널 영상은 점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 달만에 유튜브 채널에서 꽤 유명한 영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성당에 다니는 신도들만 소녀의 성냥 영상을 보았지만, 이내 고달픈 하루하루에 지친 사람들에게도 위로가 되는 영상으로 소문이 났다. 


@pixabay


사람들은 이 성냥을 켜는 작은 손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알음알음 조금씩 이 소녀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사람들은 장학기금을 마련하고, 집을 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또 이유 없이 폭력을 휘두르고, 일할 생각을 하지 않던 소녀의 아비에게 직업 훈련을 통해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학교를 갈 수 있게 된 소녀는 등굣길 첫날 생각했다. 

‘내가 가진 성냥 불빛이 가장 따뜻한 것인 줄만 알았는데... 세상에는 더 따뜻한 불이 있었구나. 바로 사람이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었어. 나도 따뜻한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해야지.’  


@pixabay




(1. 재구성 스토리 주제) 

성냥팔이 소녀의 재기에 우리의 작은 아이디어와 행동이 마중물이 되어줄 수 있어요 


(2. 작가의 말) 

 성냥팔이 소녀처럼 어려운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따뜻하게 비춰야 할 계절이 다가옵니다. 재구성한 이야기 속 아주머니와 신부님 역할을 할 이웃과 제도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12년 동안 청년들을 대상으로 취업을 위한 면접 스피치를 강의를 했습니다. 기관과 대학에 출강하며 들었던 청년들의 자기소개는 때로 마음 아픈 적이 많았습니다. 나란히 앉아 모의면접을 보고, 그들의 자기소개에 대한 피드백을 해주고, 개선점을 말해주는 스피치 강사로 제 역할을 할 때,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소위 스펙이라고 잔뜩 내세운 친구들 옆에서 아무리 쥐어짜도 내세울 것 없는 하루하루를 엮어 겨우 자기소개하는 청년들을 만났을 때는 마음이 갑갑했어요. 정말 뭐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자칫 도움을 건네는 손길이 상처나 부담이 될까 봐 용기 내지 못했던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고작 무료로 자기소개서를 첨삭해주었던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재능기부의 전부였어요. 

 이 글을 쓰면서 그때 좀 더 용기를 냈더라면, 재구성한 이야기의 새로운 등장인물인 아주머니처럼, 신부님처럼 제게는 어렵지 않았던 것들로 충분히 도움 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자조 섞인 반성을 글에 담았습니다. 조금만 돌아보고, 조금만 여유를 줄이면 소녀의 성냥처럼 사각지대도 환하게 비출 수 있습다. 우리 주변에서 어쩌면 쉽게 지나쳤을지도 모를 성냥팔이 소녀, 소년들을 함께 돌아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의 마침표를 천천히 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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