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길에 들렀던 제주에 책방에서 한 손에 잡히는 작지만 꽤 두꺼운 책 한 권을 사 왔다. 하얀색 표지에 '색 이름 352'이라는 글자만 쓰여 있는 책이었다. 다른 책 몇 권과 이책을 계산하려 하자 책방 사장님이 약간 걱정스러운 듯 말을 보탠다.
"이 책은 색깔 이름들만 쫙-쓰여있는 책이에요. 괜찮으시겠어요? 에세이는 아닙니다. 가끔 에세이인 줄 알고 사가셨다가 난감해하셔서요."
나는 배려 가득한걱정을 웃음으로 받았다.
"네, 오이뮤 작가님 책이라면 사고 싶어서요."
책은 비닐로 포장되어 있어서 책을 산 이후에나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 책이었다.
이 책은 '빨강계'부터 시작해서 '주황계', '노랑계', '자주계', '무채색계'에 이어 특수 색까지 흔히 말하는 무지개 색깔 단계별로 352개 색깔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색을 잘 표현하는 대표적인 식물, 음식, 물건, 열매들을 보기 쉽게 그려두고, 어울리는 글귀들도 조금씩 들어있어서 에세이인가 싶기도 했다.
<색이름>, 오이뮤 / 제주 서귀포 라바북스에서 구매 @꽃구름
이 책에 덥석 손이 갔던 이유는 이제 막 꽉 채운 세 살이 되어 가는 조카 덕분이다.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이야기할 줄 알게 된 어린 조카는 감정 표현이 많이 늘었다. 여름이 시작되기 전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나는 조카가 놀 수 있는 놀이 감들을 준비해 두었다. 첫 조카이기도 하고, 이사 온 집에 방문하는 첫 손님이기도 하다 보니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어' 느낌이랄까.
준비한 놀잇감 중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인형도 준비해 두었다.
"리본아~ ('리본'이는 태명이다.) 이 색깔은 뭐야?"
"주-황"
"오! 맞아~ 그렇지, 그럼 이 색깔은 뭐야?"
"초-오-록!"
세 살배기 조카는 자기가 다 아는 걸 물어보는 이모가 친구같은 느낌이었는지 약간 우쭐대기도, 방긋방긋 웃기도 하며 대답해주었다.
"그럼 이 색깔은 뭔지 이모에게 얘기해줄래?"
"헤헤헤. 분! 홍!"
정답을 맞힐 때마다 내 눈이 두 배로 커지면서 같이 깔깔 웃어주는 게 좋은지 한동안 장난감 색깔 맞히기가 계속되었다.
조카의 작은 입에서 오물 거리며 천천히 내뱉는 말, '주황, 초록, 분홍'이 색깔 이름들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요즘은 '주황, 초록, 분홍'이라는 표현 대신 '오렌지, 그린, 핑크'라는 표현을 더 자주 접한다.가끔 채널을 돌리다 나오는 홈쇼핑 채널에서는 유독 듣기 어려운 '우리말' 색 이름들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잡은이 책 제목도 '컬러'가 아니라 '색이름'이지 않은가. 얼마나 많은 색이름이 예쁘고 고운 어감의 우리말(일부는 한자어이지만)로 버젓이 있는데도 흔히, 또는 '있어 보인다(?)'는 명목으로 일부러영어로 남발하며 쓰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