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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소확행’과 닮은
소설가 이효석의 가을

by 마테호른





캡처.JPG ▲ ‘가을’을 소재로 한 것이 유독 많이 써서 ‘가을의 문인’으로 불리는 이효석. 오른쪽 사진은 1939년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시절의 모습. © 사진 출처 ㅡ 창미사



◆ ‘가을의 문인’ 이효석의 커피향기 가득한 가을


가을이다! 가을은 ‘낙엽’과 ‘단풍’의 계절이다. 가을의 정취와 낭만을 표현하는 데 그보다 더 적합한 소재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많은 작가가 ‘낙엽’과 ‘단풍’을 소재로 가을의 정취와 낭만을 그리고는 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소설가 이효석이다.

이효석의 가을은 이렇게 시작된다.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산과 바다, 화초를 사랑하고, 행복한 로맨스를 꿈꿨으며, 스키와 재즈, 원두커피를 탐미했던 이효석을 일컬어 ‘가을의 문인’이라고 한다. 그의 작품 중 ‘가을’을 소재로 한 것이 유독 많기 때문이다.

사실 이효석은 알아주는 모던보이였다. 코피를 쏟아가며 글을 쓰면서도 겨울에 스키를 타러 갈 계획을 세웠는가 하면, 원두커피 한 잔을 즐기기 위해 십 리를 걷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재직하던 학교 교무실 한쪽에 있는 음향기기를 통해 베토벤에 심취하기도 했다. 또한, 밤이면 위스키를 마시며, 클래식 기타를 연주했고, 기르던 고양이가 죽은 날에는 눈물을 흘리며 고양이의 영혼을 위로하기도 했다.



3061783.jpg ▲ 이효석은 커피 한 잔에 행복을 느꼈고, 목욕을 하며 천국에 있는 듯한 기쁨을 누렸다. 이는 일본의 소설가, 하루키의 ‘소확행’과 무척 닮았다. © 사진 출처 ㅡ freepik



◆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을 떠올리게 하는 이효석의 가을…

낙엽 타는 냄새에서 ‘헤즐넛향’을 느끼고, 목욕하면서 천국을 떠올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 (중략) …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삶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 (중략) … 물 속에 전신을 깊숙이 담굴 때 바로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 지상 천국은 별다른 곳이 아니다. 늘 들어가는 집안의 목욕실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사람은 물에서 나서 결국 물속에서 천국을 구경하는 것이 아닐까.


낙엽을 소재로 가을을 노래한 이효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며’의 한 대목이다. 낙엽을 긁어모아 태울 때 나는 냄새를 갓 볶아낸 커피향에 비유한 대목과 “목욕을 하면선 천국을 느낀다”라는 표현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효석은 낙엽 태울 때 나는 냄샘를 개암 냄새, 즉 헤즐넛 커피향에 비유했다. 그만큼 이효석은 커피 한 잔에 행복을 느꼈고, 목욕을 하며 천국에 있는 듯한 기쁨을 누렸다.

이런 이효석의 작은 행복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과 무척 닮았다. 소확행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으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수필집에서 쓴 말이다.


“집에서 갓 구운 빵을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집어넣은 속옷이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면 냄새가 풍기는 셔츠를 입을 때의 기분…”

ㅡ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랭겔한스 섬의 오후》 중에서


380668-PBPGE3-895.jpg ▲ 가을은 우리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준다.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버릴 건 버릴 줄 알아야 한다”라는 ‘버림의 지혜’이다. © 사진 출처 ㅡ freepik



◆ 가을이 주는 소중한 가르침… “버려야 할 건 과감하게 버려야만 행복할 수 있다”


가을은 우리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버릴 건 버릴 줄 알아야 한다”라는 ‘버림의 지혜’이다. 만일 계절이 다 지나도록 나뭇잎을 움켜쥐고 있다면 곱게 물들지도 못할뿐더러 갑자기 닥쳐온 추위에 마르거나 상하고 말 것이다.

우리 삶 역시 마찬가지다. 가질 때와 비울 때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힘들게 얻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버릴 것은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더 큰 불행을 막을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ㅡ 도종환, ‘단풍 드는 날’ 중에서


불볕의 여름은 어느새 사라지고, 단풍잎 곱게 물드는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열망으로 타올랐던 계절이 지나고, 이제는 차분히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볼 때다. 나아가 이효석이 낙엽을 태우면서 소확행을 찾았듯이, 나만의 소소하고, 작은 행복을 찾아야 한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 같이 뜰의 낙엽을 긁어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건만, 낙엽은 어느덧 날고 떨어져서 또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 보다. 삼십여 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건만, 날마다 시중이 조련치 않다. 벚나무, 능금나무….

… (중략) …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낸 커피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에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한없이 사랑하면서 즐거운 생활감에 잠겨서는 새삼스럽게 생활의 제목을 진귀한 것으로 머릿속에 떠올린다. 음영과 윤택과 색채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자취를 감추어 버린 꿈을 잃은 헌칠한 뜰 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가난한 벌거숭이 뜰은 벌써 꿈을 매이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된다.

… (하략) …

ㅡ 이효석, ‘낙엽을 태우면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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