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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테호른 Oct 25. 2022

중국 최초 황제의 두 얼굴

― 진시황 | 帝



출생을 둘러싼 논란


진시황 정(). 그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여 하나의 중국이라는 의식을 중국인의 머릿속에 깊게 새긴 황제그런 그를 말할 때면 어김없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바로 그의 출생을 둘러싼 비밀이다그의 생부가 여불위(呂不韋)일지도 모른다는 논란이 바로 그것이다하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진시황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억측에 불과하다그런데도 출생을 둘러싼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유는 사마천이 남긴 서로 다른 기록 때문이다. 


여불위는 한단(邯鄲, 조나라의 수도)의 여자 중에서 매우 아름답고 춤 잘 추는 여자와 함께 살다가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를 보고 반한 자초(子楚)가 여불위에게 그녀를 청했다. 여불위는 처음에는 크게 화를 냈지만, 집안이 무너져도 진기함을 낚으려는 일을 생각해 마침내 그녀를 자초에게 바쳤다.

― 《사기》 〈여불위열전〉 중에서


진시황제는 진 장양왕의 아들이다. 장양왕이 진나라 인질로 조나라에 있을 때 여불위의 첩을 보고 매료되어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시황제를 낳았다.

― 《사기》 〈진시황본기〉 중에서 


그렇다면 사마천은  왜 서로 다른 기록을 남겨 논란을 자초했을까?

사마천이 태어난 한나라는 진나라 멸망 후 세워졌다또한그가 활동할 당시 한나라의 황제였던 한 무제(漢武帝)는 자신의 비위를 거스르는 이는 무조건 극형으로 다스릴 만큼 사나운 폭군이자흉노를 몰아내고 한나라의 황금기를 만든 성군이기도 했다진시황에 버금가는 인물이었던 셈이다그러니 어떻게 해서건 진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고이전까지 최고의 황제로 알려진 진시황을 깎아내릴 필요가 있었다거기에는 진시황의 출생을 둘러싼 논란만큼 좋은 이야깃거리는 없었으리라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
.




‘하늘 아래 최초의 황제’


진왕 정(政)은 ‘하늘 아래 최초의 황제’라는 뜻에서 자신을 ‘시황제’라고 칭했다.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기원전 230, 아버지 장양왕의 뒤를 이은 진왕 정은 한나라를 시작으로 기원전 221년 제나라를 멸망시키며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다이때 그의 나이 39세로 정복 전쟁을 벌인 지 10년 만이었다. 다만엄밀히 말하면 그는 이때 중국 전체를 통일하지 못했다()나라가 엄연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진왕 정은 다른 나라는 모두 멸망시킨 후 왕이나 제후들을 평민으로 만들었지만무슨 이유인지 위나라만큼은 멸망시킨 후에도 왕의 작위를 그대로 유지하게 했다그러던 것을 이세 황제인 호해(胡亥)가 즉위 후 위의 마지막 군주 각()을 서민으로 만들면서 비로소 중국 전체를 통일할 수 있었다.


천하통일 후 진왕 정()은 하늘 아래 최초의 황제라는 뜻에서 자신을 시황제라고 칭했다. 이는 자신이 권력의 최고 정점임을 천하에 선포한 것이었다황제란 덕은 삼황(三皇)보다 낫고공적은 오제(五帝)보다 높다라는 뜻으로, ‘왕 중의 왕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그만큼 그의 자부심은 남달랐다
.




희대의 폭군


진시황을 유능한 군주에서 희대의 폭군으로 전락시킨 가장 큰 원인이 된 '분서갱유.' ⓒ 이미지 출처 - EBS 캡처


시황제는 본격적인 제국 통치에 몰두하며 각 분야의 개혁을 단행했다하지만 그 과정에서 백성의 불만 역시 적지 않았다백성을 수시로 동원하면서 국력을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혹독한 법과 지나친 형벌로 인해 민심이 점점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결정타는 분서갱유(焚書坑儒)였다알다시피분서갱유란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하여 의약과 점복농업에 관한 책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저항하는 유생들을 생매장한 사건을 말한다. 그 때문에 이후 유학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진시황을 폭군으로 격하시키며 만세의 적으로 취급했다나아가 진시황을 500년 난세를 끝낸 유능한 군주에서 희대의 폭군으로 전락시킨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죽음


2,200여 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진시황의 ‘병마용갱(兵馬俑坑).’ ⓒ 이미지 출처 - EBS 캡처


기원전 210년 7, 진시황은 자신이 제패한 천하를 둘러보고자 다섯 번째 전국 순행에 나섰다재상 이사(李斯)와 막내아들(18번째 아들) 호해, 환관 조고(趙高) 등이 뒤따랐고, 아끼던 장수 몽의(蒙毅) 역시 수행했다. 수도 함양(咸陽)을 출발하여 무관을 거쳐 위수와 한수를 따라 운몽으로 간 후 다시 장강을 통해 동쪽으로 내려가 회계에 이르는 먼 여정이었다.


순행은 순조로웠다그런데 평원진(平源津지금의 산둥성 평원현 남쪽)에 이르러 갑자기 몸져눕고 말았다이때 죽음을 직감한 진시황은 조고에게 서둘러 유서를 받아 적게 했다. “장남 부소에게 황위를 잇게 한다라는 것이었다하지만 유서를 발송하기도 전에 사구(沙丘지금의 허베이성 평향현 북쪽)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고 말았다그때 그의 나이 50세였다.


문제는 그 후에 일어났다. 부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환관 조고는 숙청당할 것을 염려해 같은 처지였던 재상 이사와 함께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쿠데타를 일으킨 셈이다. 그렇게 해서 호해를 진시황의 후계자로 옹립한 후 부소에게는 ‘불효’를 이유로 자살하게 했다. 이후 협력자인 이사마저 모함해서 죽인 조고는 사실상 진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하지만 진시황 시절의 수탈에 더해 호해의 사치가 이어진 진나라는 대혼란에 빠졌고결국 1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로써 진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나라에서 역사상 가장 단명한 통일 왕조가 되고 말았다.




영웅인가, 폭군인가


천 년에 한 명 나올만한 황제로 불리는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 이미지 출처 - EBS 캡처


1974년 3월 19일, 중국 시안 외곽 여산(廬山) 근처의 한 마을에서 극심한 가뭄 때문에 우물을 파던 중 항아리 한 개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항아리가 아닌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간 도기 인형이었다. 중국은 물론 세계사의 불가사의로 꼽히는 진시황의 병마용갱(兵馬俑坑)’이 2,200여 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이어진 발굴에서 드러난 그 규모는 실로 놀라웠다. 그야말로 지하 궁전을 방불케 했기 때문이다. 지하 4층 규모에 60만여 평에 달하는 무덤 안에는 궁전과 관청을 본뜬 건물은 물론 도굴을 막기 위해 수은이 흐르는 강과 하늘에 뜬 별자리까지 있었다.
 
지하 갱의 규모는 더욱더 놀라웠다. 180여 개에 달하는 매장 갱 중 한 곳에서만 사람 실물 크기에 무게가 200kg이 넘는 토용이 8천여 개, 말 수백여 필, 100여 대의 전차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점은 각각의 얼굴과 손 모양이 전부 다를 뿐만 아니라 신발 밑창에도 무늬를 넣을 만큼 섬세하고, 심지어 색깔까지 입혔다는 것이다. 결국, 
죽어서도 죽고 싶지 않았던 진시황의 바람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사후세계를 지키는 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하지만 자신을 시황제로 칭하고자기 뒤를 잇는 아들은 이세 황제그다음은 삼세 황제라고 하여 자자손손 나라가 번영하기를 바랐던 진시황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천고일제(千古日帝). 천 년에 한 명 나올만한 황제로 불리는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13살에 왕위에 올라 진나라를 건국하고문자를 비롯한 수많은 제도와 최초의 통일을 일궈냈지만권력에 연연하며 가혹한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그 결과영웅보다는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과연그에 관해 알려진 이야기는 무엇이 진실이고무엇이 거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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