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권(孫權) | 合
서기 200년 5월, 강동의 젊은 군주 손책(孫策)이 죽었다. 광릉 태수 진등(陳登)과의 접전을 앞두고 단도(丹徒)에 머물던 중 얼굴을 피격당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그 주동자는 허소(許昭)였다. 그에 앞서 오군태수 허공(許貢)이 헌제(獻帝, 후한의 마지막 황제)에게 밀서를 보내려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거기에는 손책을 비방하는 말이 쓰여 있었다.
손책은 용맹한 자로 항우와 비슷한 부류이니 마땅히 총애를 더해 경읍(허도)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서를 받들면 들어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나, 외방에 놔둔다면 반드시 세상을 어지럽히게 될 것입니다.
― 《삼국지》 권46 〈오서〉 ‘손책전’ 중에서
손책은 당장 허공을 불러 심문했다. 허공은 끝까지 그런 적이 없다고 했지만, 결국 죽고 말았다. 허소는 허공의 친구였다. 즉, 그는 친구의 원수를 갚기 위해 손책을 피격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손책의 어린 동생이 뒤를 이었다. 그가 바로 손권(孫權)이다. 그때 손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우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그의 어머니 무열황후(武烈皇后)가 말릴 정도였다.
그때 손권의 나이는 겨우 19세에 불과했다. 경쟁자였던 조조가 40세에 천하에 이름을 알렸고, 유비가 50세가 다 되어 겨우 작은 성을 하나 차지한 것을 고려하면, 그의 시작은 매우 빨랐던 셈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의 지지 세력이 매우 약하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핵심 참모인 장소(張昭)마저 동생 손익(孫翊)이 후계자로 더 낫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의 영(令)이 제대로 설 리 없었다.
손자(孫子)는 “인재가 갖춰야 할 자질로 적에게 지지 않는 지혜와 용기, 신의, 위엄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한 사람이 이런 능력을 모두 지니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몇 사람의 뛰어난 인재를 찾아서 부족한 부분을 서로 보완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을 제대로 실천한 사람이 바로 손권이었다.
손권은 항상 차선책을 구하고, 일 보 후퇴해서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렸다. 또한, 독단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그들과 협의를 통해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했다. 이에 신하의 장점은 존중하고, 단점은 지적하지 않는 유연함을 통해 내부 반발을 잠재우며 수많은 난관을 극복했다. 즉, 손권은 ‘통합’의 리더십을 실천했다. 그 결과, 대세를 쥐고 흔들만한 특별한 재능이 없었음에도 위·촉·오 삼국의 황제 중 가장 오랫동안 황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주목할 점은 손권이 아낀 인재의 상당수가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이거나 외부에서 이주한 가문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지지 세력이 약했던 그가 철저히 의도한 것이었다. 그를 반대하던 세력을 제압하려면 어떻게든 친위 세력을 육성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손권의 인재 정책에 전혀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손권의 가장 큰 실수는 방통(龐統)을 등용하지 않은 것이다. 방통의 재능을 알아본 노숙이 그를 등용할 것을 요청했지만,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그를 퇴짜 놓았다. 알다시피, 방통은 지략으로 제갈공명과 쌍벽을 이뤘던 인물로, 둘 중 한 명만 데리고 있어도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돌았을 만큼 그 명성이 높았다. 그 때문에 손권이 만일 방통을 등용했다면 삼국의 역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손권은 황제였지만, 누구보다도 검소했다. 다른 황제들과 달리 의복이 매우 소박했을 뿐만 아니라 노복과 궁녀 역시 100명이 채 넘지 않았고, 궁궐에도 특별한 조각이나 장식을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삼국지》의 저자 진수조차도 그를 일컬어 매우 인색하다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백성들에게 자신의 것을 베푸는 데는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 추운 날 홑옷 입은 백성에게 자신의 비단옷을 벗어주었는가 하면, 길거리에 있는 유골을 수습해서 매장하기도 했다. 그때의 손권이야말로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을 보인 진정한 현군(賢君)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수성에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문제는 술이었다.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 술을 마시면서 신하들의 재주를 시험하고, 가르침을 얻을 정도였다. 하지만 술버릇이 매우 나빴다. 술만 마시면 신하들에게 술을 권하고 마시지 않으면 죽이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당연히 실수가 잦았고, 갈수록 신하들의 간언을 멀리하며, 비위에 거슬리면 가차 없이 죽이기까지 했다. 예컨대, 말년에 이르러 그는 심우(沈友)가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며 죽였는가 하면 덕망이 높았던 성헌(盛憲)을 죽이기도 했다. 한순간에 현군에서 암군(暗君)으로 전락한 셈이다.
서기 229년, 동오의 초대 황제에 즉위한 손권은 장남 손등(孫登)을 후계자로 내세웠지만, 33세에 죽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것이 3남 손화(孫和)였다. 문제는 이때 손권이 총애하던 4남 손패(孫霸)를 같은 궁궐에 살게 하면서 일어났다. 대우 역시 똑같이 하게 했다. 그러자 신하들 사이에서는 손권이 태자를 갈아치울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팽배했고, 결국 태자파와 손패를 지지하는 파벌 사이에 내분이 벌어졌다. 이른바 ‘이궁의 변’으로 동오판 ‘왕자의 난’이다.
그 과정에서 태부 오찬이 처형되고, 고담(육손의 조카), 장휴 등 태자파의 핵심 인사들이 차례로 좌천(혹은 유배)되었을 뿐만 아니라 손권 자신이 누구보다 아꼈던 육손(陸遜)마저 죽음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는 방관할 뿐이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손권이 나이가 들더니 노망이 났다”라고 혹평할 정도였다.
서기 250년, 사건의 발단을 제공한 손권은 결국 결단을 내렸다. 태자 손화는 폐위하고, 손패는 사형에 처한 것이다. 또한, 손패파 중 적극적인 공작을 벌였던 전기・오안・손기・양축 등을 모조리 주살했다. 그리고 겨우 8살밖에 되지 않은 막내아들 손량(孫亮)을 태자로 내세우며 사태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궁의 변은 그때까지 손권 자신의 모든 공은 물론 오나라 패망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손권은 조조, 유비와 함께 천하를 삼분하며 난세를 헤쳐 나온 풍운아였다. 하지만 두 사람과 비교해서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조조와 유비가 창업자로서 서로 경쟁하며 끝까지 대결했지만, 손권은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자산을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격보다는 수성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 처지에서 보면 그다지 매력 없는 인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손권의 영웅으로서의 면모가 조조나 유비보다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보다 더 좋은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자기 땅을 지키지 못한 채 사라진 군웅(대표적인 인물로 ‘원술’이 있다) 역시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손권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어지던 난세에 50여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오(吳)를 천하의 한 축으로 당당히 올려놓고, 결국 황제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능력은 충분히 빛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말년의 연이은 실정이 모든 공과 업적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