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비 | 德
현명한 군주는 두 개의 손잡이를 가지고 신하를 통제해야 한다.
춘추전국시대 말기 법가 사상가이자 ‘제왕학(帝王學)’의 대가인 한비자의 말이다. 두 개의 손잡이란 ‘형(刑)’과 ‘덕(德)’을 말한다.
한비자는 이 두 가지를 잘 조화시켜 나가야만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무력이나 재력으로는 몸을 붙잡을 수는 있지만, 마음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덕을 행하면 마음마저 얻을 수 있기에 한비자는 “덕(德)은 득(得)이다”라고 했다. 덕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 중 그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 바로 ‘유비(劉備)’다. 알다시피, 유비는 비록 능력은 조조보다 부족했지만, 따뜻한 인품으로 관우와 장비, 제갈량 같은 천하의 인물들을 부하로 삼을 수 있었다.
‘난득호도(難得糊塗)’라는 말이 있다. 청나라 문인 정판교(鄭板橋, 본래 이름은 정섭. ‘판교’는 그의 호)가 한 말로, “바보인 척하기는 매우 어렵다”라는 뜻이다. 혼란한 세상에서 함부로 능력을 드러내 보이면 화를 당하기 쉬우므로 “자신을 철저히 감추며 바보인 척 살라”는 그만의 처세술인 셈이다.
아닌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한 위장술로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자신이 지닌 패를 모두 보여주는 것은 하수(下手)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고수일수록 자신을 숨기는 데 능숙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유비는 진정한 고수였다. 동네 건달 출신에 다혈질이고, 매우 오만했던 그는 속마음을 숨기기 위해 천둥소리에 놀라는 척하며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리는 유약한 모습을 보였는가 하면, 어리석은 행동을 일삼았다. 또한, 철저한 이미지 관리를 통해 인자하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자신을 각인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유비의 이름인 ‘비(備)’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참으면서 준비한다’라는 것과 ‘모두 갖추었다’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자(字)는 더 특별하고 무게감 있다. 유비의 자는 ‘현덕(玄德)’으로 ‘현묘한 덕’이라는 뜻이다.
노자(老子)는 ‘현덕’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낳고도 소유하지 않고, 행해도 그 공에 의지하지 않으며, 길러도 주재하지 않는 것을 이르러 ‘현덕(玄德)’이라고 한다(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 노자, 《도덕경(道德經)》 제56장 중에서
“자신의 것이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며(生而不有), 어떤 일이건 과장하거나 만족하지 않고 겸허하게 행동하고(爲而不恃), 자기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권한을 이양하고 부여할 줄 알아야 한다(長而不宰)”라는 뜻으로, 유비는 그런 노자의 그 가르침을 잠시도 잊지 않고 몸을 낮추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여가며 상대의 경계심을 풀었다.
돗자리와 짚신을 만들어 팔던 가난한 장사치에 불과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다 할 세력도, 특출한 능력도 없던 유비가 조조, 손권과 같은 준비된 영웅들과 천하를 삼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알다시피, 유비는 조조나 손권과 비교했을 때 가진 자원도 훨씬 적었을 뿐만 아니라 출발 역시 매우 늦었다. 하지만 수많은 난관과 실패를 극복하고, 결국 삼국의 한 축을 담당하며 영웅으로 자리매김했다.
유비는 타고난 재능은 조조와 손권보다 뛰어나지 않았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데 밝았고, 예의와 겸손으로써 사람을 대했으며, 인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과 부대끼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인재를 꿰뚫는 통찰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는 단순히 인재를 아끼는 것과는 달랐다. 인재를 아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능력을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쓰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유비야말로 ‘군이지인위명(君以知人爲明, 군주는 인재 알아봄으로써 밝아진다)’을 제대로 알고 실천한 리더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유비가 주위 사람들의 말만 듣고, 자존심 따위나 신경 썼다면 제갈량을 비롯해 관우, 장비, 조운(趙雲, 흔히 ‘조자룡’으로 불린다) 같은 장수들의 마음 역시 얻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는 《삼국지》 역시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유비를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리더십의 전형으로 꼽곤 한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그가 정말 무능한 사람이었다면 백성과 부하들의 마음 역시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영웅호걸을 제치고 조조와 끝까지 자웅을 겨룰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빼앗으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 한다. 이를 ‘미명(微明,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밝음)’이라고 한다. 모름지기 유연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將欲奪之 必姑予之 是謂微明 柔弱勝强).
― 노자, 《도덕경(道德經)》 제36장 중에서
유비는 실패를 통해 성장했다. 수많은 실패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배웠고, 자신을 낮추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그것을 일컬어 어떤 이들은 그를 무능하고 유약하다고 하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천하는 일찌감치 조조의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