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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테호른 Oct 26. 2022

황위를 찬탈한 패륜아

― 당 태종 이세민 | 覆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인물


서기 626년 6월 4일 이른 아침, 당 고조 이연(李淵)의 황태자 이건성(李建成)과 동생 이원길(李元吉)이 현무문에 들어섰다. 함께 온 정예병 2,000명은 문밖에 남겨 둔 채였다. 두 사람은 경비가 엄중한 궁성에 복병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임호전(臨湖殿)까지 와서야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서둘러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대형(大兄)! 어디 가시는지요?”

그 말에 깜짝 놀란 이원길이 이세민(李世民)을 향해 활을 쏘았지만, 맞히지 못했다. 그러자 이세민이 곧 이건성을 향해 활을 쏘았고, 황태자는 말에서 떨어져 즉사했다.

 … (중략) … 

깜짝 놀란 이원길은 허겁지겁 아버지 고조가 있는 무덕전(武德殿)으로 도망쳤고, 울지경덕(尉遲敬德)이 곧바로 추격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이원길의 등 정중앙에 꽂혔고, 원길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잠시 후, 울지경덕은 태자 이건성과 이원길의 머리를 현무문에 걸었다.     

― 《자치통감》 중에서


이것이 이른바 당나라판 왕자의 난인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으로이세민은 정변 3일 후 황태자가 되었고두 달여 후인 9월 4일에는 당의 제2대 황제로 등극하였으니그가 바로 당 태종이다.


이세민이 형이자 황태자인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을 죽이고 황위를 차지한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중국사에서 그런 일은 꼽을 수 없을 만큼 많기 때문이다다만눈길을 끄는 것은 황위를 찬탈한 패륜아인 당 태종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 중 한 명으로 꼽힌다는 것이다그는 어떻게 해서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군이 되었을까.




정통성 콤플렉스가 만든 중국사 최고 명군(明君)


패륜으로 황제가 된 당 태종은 부족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민심을 얻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한 결과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明君)이 되었다.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당 태종이 명군(明君)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수양제(隋煬帝폭정을 일삼아 수나라의 멸망을 초래한 수나라의 제2대 황제)의 공이 매우 크다. 양제의 실정 때문에 수나라 신하였던 그의 아버지 이연이 나라를 가로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억이 생생했던 시점에 황제가 되어 그의 치적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


또한형과 동생을 죽이고 황위를 찬탈한 부끄러운 흑역사’ 역시 그가 명군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 황제가 된 후 그는 밑에서 올라오는 상소와 간언(諫言)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문제는 민심이었다민심을 얻어야만 자신의 행위를 어느 정도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다 보니 어떤 황제보다 민심에 민감했고민심을 얻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부족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이것이 그를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만들었다.


그만큼 당 태종은 민심을 무섭게 생각했다그 결과비단길을 개척한 한 무제청의 전성기를 연 강희제의 집권기와 함께 중국사의 황금기로 꼽히는 정관(貞觀당 태종의 연호)의 치()’를 이루며 후세 군주의 모범이 되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악습을 만든 장본인


당 태종은 사서를 제멋대로 쓰고, 고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악습을 만든 장본인이다. ⓒ 이미지 출처 - 구글


당 태종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역사서는 모두 개인의 고유한 연구물이었다하지만 당 태종 이후 나라에서 역사서를 제작하게 되었다그 이유는 자신의 약점을 미화하기 위해서였다.


말했다시피당 태종은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유폐했다또한죽은 동생의 부인을 후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열 살 남짓한 조카들을 모조리 죽이는 등 수많은 패륜을 저질렀다그러니 역사적 평가 역시 당연히 신경 쓰였을 것이다.


결국당 태종은 사서를 제멋대로 고쳐서 후대 황제들에게 역사서를 자기 멋대로 쓰게 하는 악습을 남겼다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기록하고그렇지 않은 것은 철저히 숨기고삭제하는 등 역사서를 제멋대로 쓰고고쳤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모든 역사서에서 승자는 철저히 미화하고패자는 폄훼하고 왜곡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당 태종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악습을 만든 장본인
이라고 할 수 있다.




명군(名君)일지언정, ‘성군(聖君)’은 될 수 없는 이유


중국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당 태종은 명군(名君)일지언정 성군(聖君)은 될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 이미지 출처 - 구글


당연히 당 태종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먼저, 당 태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그가 누구보다 뛰어난 황제였음을 강조한다수나라 말기의 대혼란은 물론 돌궐 등과의 대외 문제 역시 잘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수양제 때의 3분의 1에 불과한 재정에도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국난을 잘 해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잘못된 과거와 악행까지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이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논지다그러다 보니 당 태종을 부정하는 이들 중에는 아예 수양제와 동급 내지는 그 이하의 인물심지어 거품만 잔뜩 낀 인물이라며 혹평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당나라를 말할 때 그를 언급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당 태종의 존재감은 매우 크다그만큼 뛰어난 황제였기 때문이다하지만 명군(名君)일지언정성군(聖君)은 될 수 없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명예와 민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가 만일 후세의 이런 평가를 듣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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