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 태종 이세민 | 覆
서기 626년 6월 4일 이른 아침, 당 고조 이연(李淵)의 황태자 이건성(李建成)과 동생 이원길(李元吉)이 현무문에 들어섰다. 함께 온 정예병 2,000명은 문밖에 남겨 둔 채였다. 두 사람은 경비가 엄중한 궁성에 복병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임호전(臨湖殿)까지 와서야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서둘러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대형(大兄)! 어디 가시는지요?”
그 말에 깜짝 놀란 이원길이 이세민(李世民)을 향해 활을 쏘았지만, 맞히지 못했다. 그러자 이세민이 곧 이건성을 향해 활을 쏘았고, 황태자는 말에서 떨어져 즉사했다.
… (중략) …
깜짝 놀란 이원길은 허겁지겁 아버지 고조가 있는 무덕전(武德殿)으로 도망쳤고, 울지경덕(尉遲敬德)이 곧바로 추격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이원길의 등 정중앙에 꽂혔고, 원길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잠시 후, 울지경덕은 태자 이건성과 이원길의 머리를 현무문에 걸었다.
― 《자치통감》 중에서
이것이 이른바 당나라판 왕자의 난인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으로, 이세민은 정변 3일 후 황태자가 되었고, 두 달여 후인 9월 4일에는 당의 제2대 황제로 등극하였으니, 그가 바로 당 태종이다.
이세민이 형이자 황태자인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을 죽이고 황위를 차지한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중국사에서 그런 일은 꼽을 수 없을 만큼 많기 때문이다. 다만, 눈길을 끄는 것은 황위를 찬탈한 패륜아인 당 태종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 중 한 명으로 꼽힌다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군이 되었을까.
당 태종이 명군(明君)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수양제(隋煬帝, 폭정을 일삼아 수나라의 멸망을 초래한 수나라의 제2대 황제)의 공이 매우 크다. 양제의 실정 때문에 수나라 신하였던 그의 아버지 이연이 나라를 가로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억이 생생했던 시점에 황제가 되어 그의 치적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또한, 형과 동생을 죽이고 황위를 찬탈한 부끄러운 ‘흑역사’ 역시 그가 명군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황제가 된 후 그는 밑에서 올라오는 상소와 간언(諫言)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문제는 민심이었다. 민심을 얻어야만 자신의 행위를 어느 정도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황제보다 민심에 민감했고, 민심을 얻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부족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그를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만들었다.
그만큼 당 태종은 민심을 무섭게 생각했다. 그 결과, 비단길을 개척한 한 무제, 청의 전성기를 연 강희제의 집권기와 함께 중국사의 황금기로 꼽히는 ‘정관(貞觀, 당 태종의 연호)의 치(治)’를 이루며 후세 군주의 모범이 되었다.
당 태종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역사서는 모두 개인의 고유한 연구물이었다. 하지만 당 태종 이후 나라에서 역사서를 제작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약점을 미화하기 위해서였다.
말했다시피, 당 태종은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유폐했다. 또한, 죽은 동생의 부인을 후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열 살 남짓한 조카들을 모조리 죽이는 등 수많은 패륜을 저질렀다. 그러니 역사적 평가 역시 당연히 신경 쓰였을 것이다.
결국, 당 태종은 사서를 제멋대로 고쳐서 후대 황제들에게 역사서를 자기 멋대로 쓰게 하는 악습을 남겼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기록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철저히 숨기고, 삭제하는 등 역사서를 제멋대로 쓰고, 고쳤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모든 역사서에서 승자는 철저히 미화하고, 패자는 폄훼하고 왜곡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당 태종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악습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당 태종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먼저, 당 태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그가 누구보다 뛰어난 황제였음을 강조한다. 수나라 말기의 대혼란은 물론 돌궐 등과의 대외 문제 역시 잘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수양제 때의 3분의 1에 불과한 재정에도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국난을 잘 해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잘못된 과거와 악행까지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이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논지다. 그러다 보니 당 태종을 부정하는 이들 중에는 아예 수양제와 동급 내지는 그 이하의 인물, 심지어 거품만 잔뜩 낀 인물이라며 혹평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당나라를 말할 때 그를 언급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당 태종의 존재감은 매우 크다. 그만큼 뛰어난 황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군(名君)일지언정, 성군(聖君)은 될 수 없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명예와 민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가 만일 후세의 이런 평가를 듣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