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李斯) | 過
능변의 지략가로 진시황을 도와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 있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수많은 역사가가 말할 정도다. 그는 진시황을 도와 천하의 인재 등용에 앞장섰고, 통일 후 각 분야의 개혁을 주도했다. 화폐단위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그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나라와 진시황을 무너지게 한 사람 역시 그였다.
그 논란의 당사자는 바로 이사(李斯)다. 그는 시대 흐름과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는 뛰어난 통찰력과 지략으로 진나라를 절대 강자로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했지만, 15년 만에 멸망으로 이끈 것도 그였다.
재소자처(在所自處).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바뀐다”라는 뜻으로, 이사가 초나라 하급 관리 시절 화장실에서 쥐를 보고 깨우친 처세의 원리다.
어느 날, 그는 변소에서 사람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달아나는 쥐를 보았다. 하지만 모든 쥐가 사람 소리에 놀라는 것은 아니었다. 곡식 창고 안에 있는 쥐는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곡식 먹기에만 바빴다. 이를 본 이사는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어질거나 못난 것 역시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한 곳에 따라 바뀔 뿐이구나.”
― 《사기》 〈이사열전〉 중에서
이를 계기로 그는 부유한 집의 쥐처럼 살기 위해 초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서 순자(荀子)에게 7년 동안 학문을 배운 후 진나라로 건너가 여불위 추천으로 13살밖에 되지 않았던 어린 왕 영정(瀛政, 진시황의 어린 시절 이름)과 만나게 되었다. 이후 온갖 감언이설로 영정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는 출세를 거듭하며 승상 자리까지 올랐지만, 곧 진시황이 ‘축객령(逐客令)’을 내려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진나라의 치수(治水) 사업을 맡고 있던 정국(鄭國)이 한(韓)나라의 첩자임이 밝혀지자 모든 외국 국적 관리의 추방을 명한 것이다. 초나라 출신인 이사 역시 당연히 그 명단에 끼어 있었는데, 그는 분연히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 호소했다.
태산(泰山)은 한 줌의 흙도 양보하지 않아 저렇게 커졌으며, 하해(河海)는 한 줄기 세류(細流)도 가리지 않아 저렇게 깊어졌습니다. … (중략) … 무릇, 물건이 진(秦)나라에서 나지 않았더라도 보물로 여길만한 것이 많고, 선비가 진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진나라에 충성되기를 원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 밖에서 온 이들을 내쫓아 적국에 보탬이 되게 하고, 찾아온 백성을 버려 원수의 나라에 이익이 되게 한다면, 이는 안으로는 나라를 비게 하고, 밖으로는 그 원망하는 마음을 제후들에게 옮겨 심게 하는 격이니, 나라가 위태롭지 않기를 바라도 그리될 수 없을 것입니다.
― 《사기》 〈이사열전〉 중에서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간축객서(諫逐客書)’ 즉,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다. 결국, 그의 말에 크게 감동한 진시황은 축출령(逐出令)을 즉시 취소하고, 그를 다시 중용했다.
사실 이때만 해도 이사는 자기 이익보다는 진나라의 안정과 앞날을 먼저 생각했다. 이에 각 분야의 개혁을 주도하고, 통일 전략을 설계하며, 통일 후의 일을 준비했다.
알다시피, 진나라는 천하통일 후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시행했다. 군현제는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눈 후 그 아래에 현을 두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통치체제로, 이를 통해 진시황은 관리의 부정부패를 막은 것은 물론 반란의 구심점 역시 사전에 제거하면서 막강한 중앙 집권 체제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군현제를 만든 사람이 바로 이사였다. 그런데 군현제가 사상 초유의 사태를 일으킨 원인이 되고 말았다.
진시황 34년, 전국에서 부로(父老) 70여 명을 초대해 연회를 벌였다. 이때 참가자 중 한 명인 복야 주청신(周靑臣)이 황제의 공덕과 군현제의 시행을 찬양하자, 순우월(淳于越)이 옛것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위해 봉건제로 돌아갈 것을 진언했다.
그 말에 황제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자, 승상 이사가 말했다.
“봉건시대에는 제후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지만, 이제는 통일이 되었고, 법령도 한 곳에서 발령되어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옛 책을 배운 사람 중에는 여전히 그것만 옳다고 생각해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 비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 복서(점술서), 농업에 관한 책과 진(秦)나라 역사서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십시오.”
― 《사기》 〈진시황본기〉 중에서
이렇게 해서 제자백가의 책과 수많은 역사책이 불태워졌는데,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다. 그런데 당시에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라서 대부분 책이 죽간(竹簡, 대나무의 마디를 이용해 글을 쓰던 재료)으로 만들어져 한 번 불태워지면 복원(復元)이 불가능했다. 그 결과, 희귀한 옛 문헌이 수없이 사라졌다. 문제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년 후 또 다른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바로 갱유(坑儒)다.
진시황 35년,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이라는 방사(方士)가 진시황을 위해 불로장생의 약초를 구하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애초에 그런 약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 사실이 발각될까 봐 몰래 도망가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유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황제를 비난했고, 이를 안 황제는 대로해서 그들을 붙잡아 심문했다. 그런데 유생들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밀고하면서 연루자가 460여 명에 이르렀다. 황제는 그들 모두를 함양으로 붙잡아 와서 생매장하며 일벌백계의 의지를 보였다.
― 《사기》 〈진시황본기〉 중에서
하지만 분서갱유는 사실관계가 분명하지 않고, 다른 주장 역시 많아서 후세의 조작으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나아가 진시황이 아닌 이사에 의한 참변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거기에는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해가면서 더 많은 권력을 탐하고자 했던 그의 끊임없는 욕심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숨겨둔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급기야 희대의 간신 조고(趙高)와 손잡고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하며 그의 탐욕은 절정에 이르렀다.
알다시피, 진시황은 장남 부소(扶蘇)를 후계자로 지목하는 유서를 남겼다. 하지만 그와 조고는 그것을 조작해 진시황의 여덟 번째 아들인 호해(胡亥)를 진의 제2대 황제로 옹립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암군이 즉위하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이사와 호해의 관계 역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록 일신의 영달을 위해 유언을 조작했지만, 적어도 이사에게는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이에 조고의 농간과 거듭되는 호해의 실정(失政)을 간언했지만,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한 호해는 결국 그를 숙청하고 말았다.
천하통일 후 그가 승상 자리에 오르자, 그의 집에 선물을 가득 실은 수레가 매일 수천 대씩 몰려들었다. 이를 본 그는 자신의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보고 걱정하면서도 그것을 절대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쓰고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이사는 비록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것을 올바른 곳에 쓰지 못한 채 끊임없이 권력만 탐하다가 나라를 망친 간신의 표본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천한 사람은 지위를 얻기 전에는 그것을 얻으려고 끊임없이 걱정하고, 그것을 얻은 후에는 다시 잃을까 봐 끊임없이 걱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잃게 되면 못 하는 짓이 없다.”
《논어》 〈양화(陽貨)〉 편 제15장에 나오는 말이다. 이사의 삶을 이보다 더 정확히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