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하(蕭何) | 柱
한의 개국 공신 ‘서열 1위’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로 평가받는 당 태종의 치세를 일컬어 ‘정관의 치(貞觀之治)’라고 한다. 정관(貞觀)이란 당 태종의 연호로, 당 태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627년부터 649년은 전대미문의 태평성세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 위징(魏徵) 같은 뛰어난 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 태종을 보좌하며 이른 바 뛰어난 재상 정치의 시대를 연 주인공들이었다. 방현령이 계획하면, 두여회가 집행하고, 위징은 끊임없이 간언하며 당 태종의 잘못을 바로잡아 후대의 모범이 되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한 고조 유방에게는 소하(蕭何)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5년여에 달했던 초한 전쟁 동안 항우에게 매번 패하면서도 결국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데는 식량과 군사가 끊어지지 않게 했던 소하의 도움이 매우 컸을 뿐만 아니라 백수였던 시절부터 그의 도움을 자주 받았기 때문이다. 유방에게 있어 소하는 더없이 소중한 친구이자 가난했던 시절의 은인이었던 셈이다. 그런 소하를 생각하는 유방의 마음 역시 매우 각별했다.
천신만고 끝에 숙적 항우를 물리친 유방은 소하를 일등 공신으로 선포했다. 당연히 수많은 공신이 이의를 제기했다. 자신들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소하는 후방에서 보급을 담당한 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를 일등 공신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사냥에서 짐승을 쫓아가서 죽이는 것은 사냥개지만, 사냥개의 줄을 풀어 짐승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은 사람이오. 그대들은 단지 짐승을 잡아 올 수 있을 뿐이니, 그 공로는 사냥개와 같소. 하지만 소하는 사냥개를 풀어 짐승을 잡아 오게 한 사람이니, 그 공로가 사냥꾼과 같다고 할 수 있소.
― 《사기》 〈고조본기〉 중에서
이 말에 누구도 더는 불만을 말할 수 없었고, 유방은 소하를 곧 상국(相國)으로 임명하고, 구석(九錫, 황제가 큰 공을 세우거나 크게 신임하는 신하에게 내리는 특전)을 하사했다. 이는 400여 년 한나라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소하는 유방을 그리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지 않았다.
유계(유방)는 원래 큰소리를 자주 치지만, 이루어지는 일은 드뭅니다.
― 《사기》 〈고조본기〉 중에서
소하가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한 유방의 참모가 된 것은 인재를 알아보는 재주가 뛰어났던 그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즉, 소하에게 있어 유방은 이상이 아닌 목적 실현의 도구였던 셈이다. 이에 유방이 다른 공신들처럼 끊임없이 의심할 때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천하통일의 대업을 먼저 이룬 후 자신이 뜻한 바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소하는 눈앞의 이익보다는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다. 진나라의 함양 궁전을 함락했을 때 대부분 장수가 보물창고를 가장 먼저 찾았지만, 그만은 홀로 승상부(丞相府, 재상의 집무실)와 어사부(御史府, 감찰 기관)를 먼저 찾아 각종 법령과 문서를 거두어 보존했다. 창업 후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건국 후의 계획이 모두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주목할 점은 그 후 함양 궁전이 불에 타서 모든 문서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하가 아니었다면 진나라의 모든 기록이 함께 사라진 것은 물론 한나라 역시 제국의 기틀을 닦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성야소하 패야소하(成也蕭何 敗也蕭何). “성공도 소하에게 달려있고, 실패도 소하에게 달려있다”라는 뜻으로, 한신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한신이 대장군이 된 것은 소하가 천거했기 때문이요, 그가 죽음을 맞이한 것은 소하의 꾀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성공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고, 실패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다(成也蕭何 敗也蕭何)’라는 말이 떠돌게 되었다.”
― 홍매(洪邁), 《용재속필(容齋續筆)》 중에서
알다시피, 유방은 한신의 군사적 능력을 항상 부담스러웠다. 한신의 군대가 막강할 뿐만 아니라 따르는 사람 역시 많았기에 혹시라도 그가 모반을 꾀하면 황실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생사를 함께했지만, 더는 동반자가 될 수 없었던 셈이다. 이에 소하는 일찌감치 한신을 제거함으로써 유방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경솔하고 조심성 없는 행동이야말로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전답과 가옥을 항상 외딴곳에 마련했고, 집을 지을 때는 담장을 세우지 않았을 만큼 검소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나자, 한 황실은 아들 소록(蕭祿)에게 작위를 세습하게 했다. 또한, 차후(酇侯)의 작위를 세습한 후손이 죄를 지어 작위를 박탈당하고 다섯 번이나 후사가 끊겼지만, 그때마다 그의 후손을 찾아서 후로 봉하여 작위를 잇게 했다.
소하에 대한 한 황실의 예우는 남달랐던 이유를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하가 이룩한 공훈은 다른 공신들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높고 컸다.
― 《사기》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중에서
공자는 《논어》 〈자한(子罕)〉 편에서 “인자(仁者)는 사리사욕이 없으므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의심하지 않고, 지자(知者)는 사물의 도리에 밝아서 시비와 선악의 판단이 정확하기에 근심하지 않으며, 용자(勇者)는 의로써 일을 결행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知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라고 하였다.
소하의 삶을 이보다 더 정확히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소하는 인자이자, 지자였으며, 때로는 용자의 삶을 살았다. 비록 한초삼걸 중 가장 튀지 않았지만, 그런 그가 있었기에 유방은 제업을 이룰 수 있었고, 한나라는 400여 년의 기틀을 닦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