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갈량(諸葛亮) | 忠
충(忠). 충성, 공평, 정성 등을 뜻하는 한자다. 가운데를 뜻하는 ‘중(中)’과 마음을 나타내는 ‘심(心)’이 합쳐진 글자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마음’, 즉 ‘올곧은 마음’을 뜻했지만, 고대 유가(儒家)에서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 취해야 하는 태도를 충(忠)이라고 하면서 ‘임금이나 나라에 대한 충성’을 뜻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신하의 도리를 지키고, 나라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이들을 기릴 때 ‘충’이란 시호를 붙이곤 한다.
《삼국지》에도 ‘충’이란 시호가 붙은 인물이 있다. 바로 제갈량(諸葛亮)으로, 그의 시호는 ‘충무(忠武)’다.
알다시피, 제갈량은 탁월한 능력과 충성심으로 당대는 물론 후대 사람의 존경을 동시에 받으며, 훌륭한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의 모범으로 꼽힌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조조에게 여러 차례 회유를 받았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삼고초려의 은혜를 잊지 않고 유비와 유선(劉禪) 2대를 섬겼다.
사실 ‘충무(忠武)’라는 시호는 군사적인 일에서 훌륭한 공적을 쌓은 이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군사보다는 내치에 더 치중했던 제갈량과는 어울리지 않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촉의 2대 군주인 유선은 변치 않은 그의 충성심을 높이 샀기에 그와 같은 시호를 내렸다.
그대의 천성은 문무를 겸비하고 밝은 지혜를 갖췄으며, 독실하고 성실하여 탁고의 유조(遺詔, 임금의 유언)를 받아 몸소 짐을 보필하니, 끊어진 것을 잇고, 쇠미한 자를 흥하게 하며, 난세를 평정할 뜻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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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덕을 존중해 공의 순서를 세우고 행적을 기록해 시호를 명하니, 이로써 장래에 빛나게 하고 책에 기재하여 쇠하지 않게 하려 한다.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중에서
유비에게 있어 제갈량은 ‘날개’와도 같았다. 제갈량 얻은 후 조조 및 손권과 비로소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제갈량을 유비가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했는지는 그를 얻은 후 관우와 장비에게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중에서
국궁진력(鞠躬盡力).
제갈량이 1차 북벌에서 실패한 후 두 번째 출정에 앞서 유선(劉禪)에게 바친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말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낮춰 온 힘을 다한다”라는 뜻이다.
신은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고, 죽은 후에야 그것을 멈출 것입니다(臣 鞠躬盡力 死而後已).
―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중에서
이 말 만큼 제갈량의 삶을 잘 나타낸 문장은 없다.
유비는 죽으면서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이 시원찮거든 대신 나라를 맡아 달라”는 탁고(託孤, 고아의 장래를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함)를 남긴다. 그러자 제갈량은 흐느껴 울면서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은 언제까지나 신하로서 충성을 다할 것이며, 목숨 걸고 태자 전하를 지킬 것입니다”라고 맹세했다.
그 후 제갈량은 마지막 힘을 모아 위나라와의 싸움에 나섰다. 하지만 그것은 모험에 가까웠다. 당시 위나라와 촉나라의 군사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했을 때 6대 1 정도로 촉나라가 절대 열세였기 때문이다.
제갈량 역시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위나라와의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나선 것은 자신을 알아준 유비에 대한 충성심때문이었다.
한때 많은 직장인이 《삼국지》의 인물 중 가장 모시고 싶은 리더로 제갈량을 꼽았다. ‘공명정대하고, 공·사가 분명하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말마따나, 제갈량은 모든 일을 처리할 때 세 가지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이른바 ‘3공(三公)’으로 ‘공개(公開)·공정(公正)·공평(公平)’이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본인에게조차 엄격하게 이 원칙을 적용했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또한, 군사적인 면에서는 ‘선엄후관(先嚴後寬)’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먼저 엄하게 대한 후 너그럽게 대한다”라는 뜻으로, 오합지졸의 군대를 일사불란한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고삐를 바짝 당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읍참마속(泣斬馬謖)’ 역시 그래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는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 비록 마속을 아끼기는 했지만, 군령을 어긴 그를 죽임으로써 군대의 사기를 한껏 끌어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조직을 이끄는 냉혹한 리더이기도 했다. 또한, 부하들의 개성과 흠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기에 뛰어난 인재를 평범한 인물로 만들기도 했고, 심지어 자신과 맞지 않는 인물은 죽이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위연(魏延)이 있다. 촉한의 뛰어난 장수였던 위연은 유비의 품에서는 천재적 기량을 발휘했지만, 제갈량의 손에 죽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제갈량이 유비를 보좌하는 동안 후계자를 키우지 못하는 치명적 실수로 이어졌고, 이는 촉이 채 50여 년도 못 되어 위나라에 의해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지방의 가난한 선비였던 제갈량은 유비의 삼고초려에 의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위나라의 역사학자 어환(魚豢)이 남긴 《위략(魏略)》과 서진의 역사학자 사마표(司馬彪)가 집필한 《구주춘추(九州春秋)》에 적힌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진수 역시 《삼국지》에서 이를 인용했다.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자, 제갈량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형주 자사 유표(劉表)가 조조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제갈량은 인근 번성(樊城)에 머물던 유비를 찾아갔다. 하지만 유비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제갈량이 조조의 침공을 물리치려면 북방 유민을 받아들여 세수를 늘리고 군사력을 증진해야 한다고 하자, 그제야 그의 이름을 묻고 ‘와룡을 알아보지 못했다’라고 했다.
―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중에서
중요한 것은 유비의 삼고초려가 먼저인지, 제갈량이 먼저 유비에게 다가갔는지가 아니다. 제갈량이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최고의 명참모였다.
제갈량이 없었던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유비가 당대의 영웅이었던 조조, 손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유능했고, 한 나라를 이끌만한 했다. 생각건대, 적벽대전 당시 제갈량의 ‘지천명(知天命)’이 없었다면 유비는 대세를 장악한 조조를 절대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아는 중국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 틀림없다.
서기 234년 봄, 5차 북벌에 나선 제갈량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오장원에 진을 치고 위의 사마의와 대치했다. 하지만 사마의는 수비만 할 뿐 전혀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제갈량이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는데, 그는 “정군산에 묻어 달라”라는 유언을 끝으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이때 그의 나이 54살이었다.
정군산은 제갈량이 군대를 정비하며, 천하 통일이라는 대업의 꿈을 키운 곳이었다. 이에 비록 천하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죽어서도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자 했다.
이렇듯 제갈량은 유비를 위해 죽는 순간까지 충성을 다했다. 그 결과,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이 뜬구름처럼 사라졌지만, 제갈량만은 수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살아남아 많은 이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삼국지》의 실제 주인공은 제갈량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