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승자 없는 전쟁, 형태만 바뀐 세계 질서

by 마테호른


냉전은 과연 끝났는가?

1991년 12월, 소련(USSR)의 붕괴는 냉전 체제의 종식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양극 체제를 지탱하던 한 축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미국과 서방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선포했다.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그의 저서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서, 인류의 이념 투쟁은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로 수렴될 것이라 낙관했다. 하지만 그 낙관은 오래가지 못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세계는 단일한 보편 가치를 중심으로 통합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는 갈등과 분열, 서로 다른 가치와 체제를 추구하는 국가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냉전’이라는 단어는 단지 과거 특정 시기를 지칭하는 역사적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지정학적 감각이며,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하나의 구조적 사고방식으로 남아 있다.




형태만 바뀐 ‘신냉전’ 시대

오늘날 우리는 ‘총과 핵’ 대신 ‘데이터와 칩’, ‘동맹과 규범’을 무기로 삼은 새로운 냉전 구도 속에 살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은 과거 미국-소련의 이념 대결보다 훨씬 복잡하고, 실질적이며, 광범위하다.


⚫ 기술 패권 경쟁

반도체, 인공지능(AI), 통신망(5G~6G)은 단순한 산업 경쟁을 넘어선 안보이자, 국제 질서를 규정짓는 핵심 영역이 되었다. 기술 우위를 확보하려는 경쟁은 각국의 산업정책과 외교 안보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 경제의 블록화

세계화는 퇴조하고 있으며, ‘디커플링(Decoupling, 한 나라 경제가 특정 국가 혹은 세계 전체의 경기 흐름과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현상으로 ’탈동조화‘라고 한다)’과 ‘디리스킹(Derisking, 적대적이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위험 요소를 점차 줄여나가는 것)’이 주요 정책 용어로 부상했다. 미·중 간 공급망 전쟁은 각국에 새로운 선택을 강요하며, 자국 중심의 경제 안보 전략을 강화하게 만들고 있다.


⚫ 외교와 가치의 진영화

미국과 유럽 등 민주주의 국가들은 ‘가치 동맹’을 구축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여 중국, 러시아 등 권위주의 체제는 자국 중심의 질서와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이 같은 진영 간 대결 구도는 냉전 시절의 이념 대립을 떠올리게 한다.


냉전의 본질은 단지 군사적 충돌을 피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질서를 중심으로 세계를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대결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신냉전’은 단지 두 나라의 경쟁을 넘어, 모든 국가에게 ‘편 가르기’라는 전략적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냉전은 구조다: 사고방식과 세계 질서의 프레임

냉전은 더 이상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세계 정치와 외교의 저변에 깔린 코드이며,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프레임이다.


오늘날 각국은 다음과 같은 구조 속에서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적대적 세계 인식


안보·경제를 특정 블록(동맹) 속에 통합하는 전략


국내 문제를 외부 위협으로 전환해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레토릭


이 구조는 비단 미국과 중국, 러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 유럽, 한국, 인도, 동남아 국가들까지 모두 자국의 경제·안보 전략을 수립할 때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냉전은 여전히 우리를 선택의 여지가 제한된 세계, 즉 진영이라는 운명 속에 살게 한다.




한반도, 냉전의 유령이 떠도는 곳

한반도는 냉전의 잔재가 가장 뚜렷이 남아 있는 지역 중 하나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평화협정 없이 대치 상태가 이어지고 있으며, 북한의 지속적인 핵 개발과 미사일 실험은 냉전 시절의 군사적 긴장을 반복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여기에 남북 관계는 미·중 갈등의 하위 구조로 작동하고 있으며, 한국은 미국과의 안보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첨단 산업에서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서 미·중 기술 냉전의 핵심 접점이기도 하다.


냉전의 종식을 누구보다 원했던 한국은 아이러니하게도 냉전 이후의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전략적 선택을 요구받는 나라가 되었다.




냉전 이후를 말할 준비는 되어 있는가?

냉전은 단순히 두 강대국만의 대결 구도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인식하고, 행동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지금도 여전히 작동 중이다.


기술 냉전, 가치 냉전, 지정학 냉전의 시대에 우리는 20세기의 언어로 말하고, 20세기의 전략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제 진짜 필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냉전이 끝났다고 선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는 그 이후를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진영의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 인식과 정치적 상상력이다. 따라서 탈진영, 다자주의, 지역 공동체 기반의 협력, 비국가 행위자의 역할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질서의 상상과 구축이 절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다시, 이름만 바뀐 또 다른 냉전의 시대를 살게 될지도 모른다.



한 문장 요약

냉전은 단순히 종결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인식 속에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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