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록>, '부끄러움의 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자 저항정신의 원류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1942년 1월 24일에 쓴 <참회록>이다. 국내에서 쓴 마지막 작품으로, 흔히 시인을 일컬을 때 말하는 ‘부끄러움의 미학’을 가장 대표하는 작품이다. 육필 원고에 ‘시(詩)란? 부지도(不知道)’, ‘생존(生存)’, ‘생활(生活)’, ‘힘’ 등의 낙서가 어지럽게 쓰여 있어 이 한 편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단상을 떠올리며 고민했는지 알 수 있다.
1942년 3월, 시인은 일본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쳐야만 했다. 이른바 ‘창씨개명’으로, 당시 일본 유학을 하려면 반드시 그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 결과, 시인은 ‘히라누마 도쥬(平沼 東柱)’가 되었다.
창씨개명을 닷새 앞두고 쓴 〈참회록〉은 그때의 참담함과 괴로움을 담은 작품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한 인간의 내면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이 시는 그가 그것을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일본 유학 시절 내내 이어졌다.
시인의 도시샤대 동기에 의하면, 시인은 수줍음이 많아서 수업 시간이면 항상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 조용히 수업을 들었으며, 노래를 부를 때면 항상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펜을 통해 일제에 저항하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줬다. 더는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시인은 죽는 날까지 오직 우리 말로만 시를 썼다. 이는 나라를 잃었을지 모르지만, 정신과 문화만큼은 절대 잃지 않겠다는 시인의 마지막 저항이자 다짐이기도 했다.
혼란의 시대, 시인이 보여준 그런 올곧은 삶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민족의 등불이 되어 우리가 혼란을 겪을 때마다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다. 시인의 시가 수십 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를 감동하게 하고 눈물짓게 하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