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가 살아생전 '시인'이라 불리지 못한 이유

생전에 시집을 펴내지 못했던 윤동주

by 마테호른


윤동주는 시대적 고뇌와 인간적 성찰을 서정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한 최고의 민족 시인이다. 그는 어둡고, 암울한 시대 ‘문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민족을 위로하고, 독립에 대한 희망을 끊임없이 노래했다. 하지만 생전에 시집을 펴내진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시인’이라는 칭호를 얻지 못한 셈이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1941년 겨울, 〈별 헤는 밤〉, 〈자화상〉 등의 19편을 묶어 77권 한정으로 시집을 내려고 했지만, 일본의 삼엄한 검열로 인해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살아생전에 시인으로 등단한 적이 없는 윤동주에게 ‘시인’이라는 칭호를 처음 부여한 사람은 조부 윤하현이었다. 그는 금지옥엽으로 키운 손자가 압제자의 땅에서 만 27년 2개월(햇수로는 29년)이라는 짧은 삶을 마감하자, "내 손자, 동주의 일생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의 삶이었다"라면서, 자신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손자의 비석으로 사용하며, 거기에 ‘시인 윤동주 지묘(詩人 尹東柱 之墓)’라고 썼다.



숭실 중학 시절 조부 윤하현의 회갑연. 윗줄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가 윤동주 시인. 출처 :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사업회



독실한 기독교 장로로 마을의 유지이기도 했던 시인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독립투사들에게 독립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시인은 그런 할아버지를 보고 자라며, 일찍부터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사실 시인이 문학을 계속할 수 있었던 데는 할아버지 윤하현의 도움이 매우 컸다.
1937년 광명학교 졸업반 시절, 시인은 상급 학교 진학 문제로 아버지 윤영석과 심한 갈등을 빚었다. 아버지 윤영석은 의대나 법대에 진학하기를 바랐지만, 시인은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시인이 단식투쟁까지 하자, 보다 못한 할아버지 윤하현이 두 사람을 중재했다. “동주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야 한다”라며 시인의 편을 든 것이다. 그러면서도 “고등고시를 봐야 한다. 봐서 꼭 성공해야 한다”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당시 만주로 이주한 사람 대부분은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만주가 아닌 한반도를 고향이라고 가르쳤고, 고향의 산과 하늘, 땅을 항상 그리워했다.


시인의 조부 윤하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증조할아버지 윤재옥이 1886년 고향 함경북도 종성을 떠나 북간도로 이주한 후 시인의 가족은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며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동쪽을 밝힌다’

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명동(明東)’이라고 짓고, 1908년 ‘명동서숙(이듬해 ‘명동학교’로 개칭)’을 지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는 달리 대부분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낯선 땅에서 삶을 마감해야만 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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