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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리시아 Jul 31. 2024

물거품이 된 노력

명선은 결혼 후 단 한 번도 깊은 잠에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매일같이 아이들을 재워놓고 새벽에 만취 상태로 들어오는 영수를 기다리다 소파에서 잠이 들곤 했다. 남편에 대한 정이 남아있거나 기다리고 싶어서 기다린 건 아니었다. 영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옷가지를 벗어 바닥에 내팽개치다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쿵 하고 넘어지는 바람에 아이들이 놀라 깬 이후로 명선은 항상 영수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늘 새벽에 술에 찌들어 들어오는 남편이 치가 떨리게 싫었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그의 옷가지를 세탁실로 치워놓고 낑낑거리며 작은방으로 데리고 가 이부자리에 눕히고 잠옷바지를 입혔다. 아침마다 아이들이 아빠를 보기 위해 작은방을 기웃거리는 것을 알았기에 최소한의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명선의 노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수는 단 한 번도 고마워할 줄을 몰랐다. 오히려 가면 갈수록 가관이었다.

꿀물을 내오라고 하거나 배가 고프니 라면을 끓여달라는 등의 요구를 하는 날도 있었다. 명선은 그런 영수가 너무나도 꼴이 보기 싫었지만 그나마 주사를 부리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꾹 참고 견뎠다.

명선이 이 모든 것을 견딘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어떻게든 가족이라는 틀을 유지하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영수와 선을 본 후 결혼한 명선은 일을 해 본 경험이 없었고, 두 아이를 키우느라 육아와 살림에 전념한 채 살아왔다. 그런 그녀에게 어쩌면 유일한 삶의 목표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화목하지는 못하더라도 두 아이들을 아빠 없는 아이들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명선은 몰랐다. 이미 아이들은 아빠의 정서적 부재를 충분히 느끼고 있었고 명선이 억척스럽게 유지해 온 관계는 속이 곪을 대로 곪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명선은 그래도 영수가 단 한 번도 외박을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매일매일이 최악 같았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집에 들어오는 영수가 고맙게까지 느껴졌다. 이미 실패한 결혼생활과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하루에 열 마디를 나눌까 말까 한 남편이었지만 그래도 외도는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만약 영수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가까스로 붙잡고 있는 이성의 끈이 끊어질지도 모를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술에 취한 영수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명선의 품에 안겼다. 명선은 평소와 다른 남편의 행동에 어쩔 줄을 몰랐다. 자신을 부둥켜안은 영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명선의 귀에 낯선 여자의 이름이 들려왔다.


“은희야, 미안해. “


영수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잠이 들었는지 명선의 품에서 점점 물 먹은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은희…?’


명선은 유일하게 남아있던 믿음 한 조각이 산산조각 남을 느꼈다. 명선은 그날 밤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이 등교한 후 명선은 식탁의자에 조용히 앉아 영수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영수는 전날 밤 기억이 전부 삭제되었는지 작은방에서 나와 명선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나 꿀물 한 잔만 줘.”


명선은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영수는 답답하다는 듯이 목소리 톤을 높였다.


“나 꿀물 한 잔만 좀 달라고. 안 들려?”

“은희가 누구야?”


영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명선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뭔 헛소리야. 아침부터 뭐 잘못 먹었어? 됐다, 됐어. 너한테 뭘 바란 내가 등신이지. “


영수는 냉장고를 향해 휙 돌아섰다. 명선은 돌아선 영수에게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술 먹고 들어온 당신 뒤치다꺼리한 세월이 벌써 10년이 넘었어. 이제는 현관문 열고 들어오는 그 모습만 봐도 무슨 술을 마셨는지, 얼마나 마셨는지 다 안다고. 아무리 머리끝까지 술을 퍼먹고 들어와도 당신 나한테 헛소리 한 번 한 적이 없어. 근데 어제는 내가 똑똑히 들었어. 은희야 미안해? 도대체 은희는 누구고 뭐가 미안한 건데? 여자 생겼어? 술 먹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바람까지 피우시겠다? 진짜 가지가지한다. 내가 당신한테 대단한 거 바랬니? 애들 성인 될 때까지 무늬만 아빠여도 좋으니까 제발 애들 옆에 있어달라고 했지? 나 이제 더 이상은 못해. 당신이라는 인간을 만난 순간부터 내 인생이 망가졌어. 시도 때도 없이 나를 파출부처럼 불러제끼는 당신 어머니랑 누나들도 지긋지긋하고 남편 노릇은 고사하고 껍질만이라도 애들 옆에 있어달라는 내 유일한 부탁까지 싸그리 무시한 당신이란 인간을 이제 미워할 기운도 없어. “


명선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금 더 진정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곧 서류 도장 찍어 놓을 테니까 내 인생 더 망치지 말고 깨끗하게 끝내자. 애들한테는 내가 설명할게. 당신 가족들한테도 내가 설명할 거야. 당신 어머니도 이혼의 책임이 당신한테 있다는 걸 아셔야지. “


영수는 명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대답했다.


“나라고 너 같은 여자랑 살고 싶은 줄 아냐? 네 마음대로 해.”


영수는 냉장고를 열어 물통을 꺼내 입에 갖다 대어 벌컥벌컥 마시고 작은방으로 휙 들어가 출근준비를 마친 후 명선을 쳐다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명선은 한참을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웠다. 친정에는 어떻게 알려야 덜 충격을 받으실지, 시댁에 영수의 외도 사실을 전하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명선이 그렇게 애써 노력해 왔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졌다는 사실을 가장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의 부족한 안목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은 물론 아이들의 인생까지 망쳐버렸다는 죄책감이 명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명선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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