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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리시아 Jul 29. 2024

낯선 여자

"여보세요."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야 할 수화기 너머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현아는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다.


"여보세요?"


여자가 다시 물었다.

현아는 순간 전화를 잘못 걸었나 싶어 얼른 끊으려다가 확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화기를 든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현아는 한껏 긴장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현아고요, 김영수 교수님의 딸이에요. 이거 김영수 교수님 전화 아닌가요?"


여자는 현아의 말을 듣고는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교수님 지금 좀 바쁘셔서 전화를 받으실 수가 없단다. 교수님 오시면 전화했었다고 전해줄까?"

"네, 아빠한테 다시 전화 달라고, 기다린다고 꼭 좀 전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참 친절한 분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 너머로 아빠의 목소리와 방금 그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바로 전화가 끊어졌다.

아직 어리지만 눈치가 빠른 현아는 우선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왠지 엄마가 알면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저녁이 되어도 아빠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엄마는 웬일인지 현아와 언니를 데리고 바로 건너편에 있는 갈빗집에 가서 외식을 하자고 했다. 현아는 서운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자신과 언니를 챙겨주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슬퍼졌다. 현아는 밥을 먹는 내내 그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며칠 후, 현아가 학원에 간 언니를 기다리며 방에서 혼자 숙제를 하고 있는데 멀리서 엄마의 통화소리가 들렸다. 현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귀를 쫑긋 세우고 문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애들 때문에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는데 이제 더 이상은 못하겠어. 그 인간 딴 여자 있는 것 같아."


현아는 가슴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엄마는 이미 그 여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했다.

현아가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아빠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자신과 언니를 위해 서로의 거리를 지키며 가족이라는 틀을 부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현아와 언니에게 관심도 없는 듯했지만 어린 현아는 그런 아빠라도 있다는 게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좋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빠 휴대폰 너머 낯선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후부터 현아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현아는 엄마가 그 낯선 여자의 존재를 모르길 바랐다. 엄마가 알게 되는 순간 현아네 가족을 아슬아슬에게 이어 놓고 있던 끈이 한순간에 끊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려가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엄마의 통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나 매일 아침 일어나서 그 인간이 새벽에 집에 들어오면서 바닥에 벗어 팽개쳐놓은 옷가지를 볼 때마다 정말 가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어제는 아침에 눈을 떴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 줄 알아? 심장마비로 죽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거 알아? 심장마비도 그 인간한테는 사치야. 나를 십 년 넘게 무시하고 짓밟았는데 그렇게 편하게 죽으면 안 되지.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었으면 좋겠어. 그 정도로 치가 떨리게 싫어.

서류는 이미 다 준비해 놨어. 그 인간 도장만 찍으면 돼. 위자료? 다 필요 없어. 그냥 나랑 애들만 그 진절머리 나는 집안과 깨끗하게 남남이 돼서 평생 안 보고 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어."


현아 엄마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했다.

엄마는 그날 저녁 이제 막 열 살을 넘긴 현아와 한 살 터울의 현아 언니를 앉혀놓고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엄마는 아빠와 이혼 후 우리와 살 집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나이에 비해 영리하고 눈치가 빠른 현아는 옆에서 엉엉 울고 있는 언니를 달래며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현아 엄마는 작성한 서류를 작은방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날이 밝으면 남편이 일어나 서류를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아 엄마는 현관 불을 켜놓고 안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마음이 편해진 탓인지 그날따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이 되자 현아는 눈이 번쩍 떠졌다. 이제 곧 다가올 변화가 두렵고 슬펐다. 엄마가 작은방에 둔 이혼서류를 본 아빠가 엄마에게 노발대발 화를 내면 어쩌나 무서웠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헛구역질이 났다.

현아는 얼른 언니를 깨워 거실로 나갔다. 거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현아는 먼저 안방으로 달려갔다. 엄마가 아직 침대에 누워있었다. 엄마가 충격을 못 견뎌 쓰러졌거나 심장마비 같은 걸로 죽은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얼른 엄마 곁으로 가 엄마 코에 손을 대보았다. 다행히 엄마는 숨을 쉬고 있었다.

현아는 다시 거실로 나가 작은방으로 향했다. 닫히지 않아 살짝 열려있는 문 앞에 서 있는 언니가 보였다.

현아는 작은 목소리로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아빠 아직 자고 있어?"


언니는 대답이 없었다.

현아는 언니가 서 있는 작은방으로 갔다. 작은방은 언제나처럼 불이 꺼진 채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술냄새가 나지 않았다. 현아는 구석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을 아빠를 보기 위해 문을 조금 더 열고 문틈 사이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작은 방은 어제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아빠는 거기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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