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아의 기억 속 아빠는 하얀 메리야스와 남색 실크 잠옷바지를 입고 이불도 덮지 않은 채 화장실 옆 작은방 구석에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자는 모습뿐이었다.
현아와 언니는 등교 준비를 하며 화장실에 갈 때마다 문고리가 고장 나 늘 살짝 열려있는 작은방 문틈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창문이 없어 동굴처럼 어두컴컴한 방에서 술냄새가 진동했다. 어린 자매는 학교에 가기 전 잠시라도 일어난 아빠의 모습을 보고 싶어 일부러 시끄럽게 떠들어봤지만 아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명선은 자매가 작은방 앞을 기웃거릴 때마다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짐승도 제 자식 귀한 줄 안다는데 짐승만도 못한 인간같으니라고. 술이 그렇게 좋으면 평생 술 먹으면서 혼자 살지 왜 결혼은 해서 남의 인생을 망쳐, 망치기를. 자식들 인생까지 망치기 전에 차라리 얼른 죽어주는 게 도와주는 건데. 술을 저렇게 마시는데도 간이 안 망가지나 봐. “
청각이 예민한 현아는 엄마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했다. 늘 반복되는 일상이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현아는 점점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아무런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치워진 작은방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아빠는 이미 출근한 뒤였다.
현아가 언니와 숙제를 하고 노는 동안 명선은 늘 몇 시간씩 전화통화를 했다. 현아는 제 할 일을 하면서도 엄마의 통화소리에 귀 기울였다.
외할머니, 이모, 친구 등 통화상대는 바뀌었지만 내용은 항상 같은 레퍼토리였다. 박복한 팔자에 대한 신세 한탄, 시댁식구들과 아빠에 대한 비난과 저주.
명선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지옥 같은 삶에 숨이 막혀버릴 것만 같았다. 마음속 응어리를 몇 시간에 걸쳐 쏟아내야지만 남은 하루를 살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듣고 있던 어린 현아의 마음속에는 엄마가 자신을 두고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더 크게 자라나 엄마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되어 현아의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
현아는 엄마를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몇 날며칠을 고민해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어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학교에서 상장을 타왔다. 엄마는 어김없이 현아와 언니가 숙제를 하는 동안 전화를 걸었다. 현아는 여느 때처럼 귀 기울여 엄마의 통화내용을 들었다.
누구와 통화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엄마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있었다. 엄마는 언니의 칭찬을 늘어놓으며 남편복은 없어도 자식복은 있다는 말 끝에 오늘같이 특별한 날에 네 식구가 오손도손 외식해 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현아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통화를 끝낸 현아 엄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현아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5시 30분.
지난번 엄마가 통화할 때 아빠는 5시면 수업이 끝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현아는 거실 소파에 앉아 수화기를 들고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지만 정확하게 외우고 있던 아빠의 휴대폰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신호가 가는 동안 현아는 침을 꼴딱 삼키며 할 말을 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오니…”
현아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을 더 걸어보았지만 아빠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날 저녁에도 아빠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현아는 그다음 날부터 엄마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매일같이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의 목소리 대신 들리는 음성사서함 서비스 메시지가 진절머리 나게 싫었지만 현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몇 번의 신호음 끝에 드디어 ‘딸깍’하고 전화받는 소리가 들렸다. 날아갈 듯이 기쁜 마음으로 아빠를 부르려던 찰나, 현아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여보세요.”
낯선 여자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