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
고요한 적막 속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시계 초침 소리가 명선의 마음을 더 불안하게 했다. 소파에 앉아 언제 올지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다시 오후 일이 떠올라 눈물이 맺혔다.
명선은 오전 일찍 친정 엄마와 함께 집 근처 산부인과에 들러 임신 소식을 확인했다. 아이가 생긴 것도 기뻤지만 이제는 시댁 식구들도 남편도 조금은 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에 더 기뻤는지도 모르겠다.
“김서방도 이제 애아버지가 되면 정신 좀 차리겠지.”
친정 엄마가 한숨을 쉬며 뱉은 말에 명선은 속으로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후에 출근하는 남편에게 얼른 임신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친정 엄마를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내고 명선도 얼른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임신 소식을 들은 영수의 반응은 명선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임신이야? 조심 좀 하지 그랬어.”
맞다. 술 좋아하고 자기 엄마 밖에 모르는 인간이 막중한 책임을 요하는 자식이 반가울 리가 없다. 명선은 그때 이미 속으로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이 남편이라는 작자가 앞으로 현아엄마 인생에서 얼마나 쓸모없는 인간이 될 것인지 말이다. 하지만 뱃속 아이를 생각하며 저런 남편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되뇌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며칠이 지나도 조심 좀 하지 그랬냐는 그 말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며 잊히지가 않았다. 명선은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삼키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세 시.
전화 한 통 없이 어딘가에서 또 술을 퍼마시고 있을 남편을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현관 불을 켜 놓은 채 안 방으로 들어가 몸을 뉘이자 꾹 참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며칠 후 시어머니가 영수를 통해 임신 소식을 전해들었는지 명선을 호출했다. 명선이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시아버지는 애썼다는 한 마디와 함께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몇 장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변변한 일자리가 없어 늘 식구들 눈치를 보는 시아버지는 이렇게라도 기쁜 마음을 며느리에게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명선의 시어머니는 명선이 왔는데 내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애미 왔냐? 너는 전화 뒀다 뭐하고 바쁜 영수가 임신 소식을 전하게 만드냐?”
“죄송해요, 어머니”
“됐고, 첫째는 무조건 사내를 낳아야지. 계집애는 못 쓴다.”
혼외 자식을 가진 것도 아닌데 조심 좀 하지 그랬냐는남편과 무조건 사내를 낳으라는 시어머니의 말에 명선은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명선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말들을 다시 꾹꾹 눌러 담은 채 가까스로 용기를 내 한마디를 던졌다.
“어머님, 영수씨한테 술 좀 그만 먹으라고 해주세요. 어머님 말씀은 잘 듣잖아요.”
“영수 걔가 술을 먹고 싶어서 먹냐? 술이 좋아서 먹는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중요한 사람들하고 교류를 해야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먹는 거지. 교수 안사람은 뭐 거저 되는 줄 알았냐?”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자기 아들을 몰라도 저렇게 모를까 싶었다. 명선은 결국 꾹꾹 눌러 담았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머님, 이 세상에 교수들은 다 술먹고 다니나요? 영수씨는 어쩔 수 없이 술을 먹는게 아니라 그냥 술을 좋아해서 먹는거에요. 술 한모금도 못하는 제 친구 남편도 교순데 지금 명문대에서 애들 잘만 가르치고 있어요. 그리고 아무리 교류가 필요해서 마신다고 해도 일주일에 한 번도 안거르는건 너무하잖아요. 제가 홀몸이면 그래도 그러려니 해요. 다른 여자들처럼 한 번이라도 뭐 먹고 싶다고 사다달라고 한 적도 없어요. 그냥 하루라도 술 안 먹고 제정신으로 들어오는게 소원이라구요. 제가 많은걸 바라는건가요?”
명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 우라질 년이 어디서 시어미한테 눈을 부라리면서 우리 영수를 다른놈이랑 비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