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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리시아 Jul 23. 2024

남보다도 못한 관계


“아빠 죽었대.”


현아는 언니의 말을 듣자마자 멍해졌다.


‘아빠가 죽었다고? 누구 맘대로?’


떨어져 산지 이미 20년이 넘어서인지 아빠라는 단어도 어색했다.

옆 집 어르신이 돌아가셔도 지금보다는 더 슬프지 않을까 생각하며 언니에게 물었다.


“왜 죽었대?”

“나도 자세한 건 잘 몰라. 아까 엄마한테 전화 왔는데 한인교회 선교사라는 사람이 엄마 연락처를 물어 물어 전화했더래.”

“그래서?”

“아빠랑 같이 도망간 그 여자랑도 진작에 헤어졌나 봐. 돌봐주는 사람도 없었나 보던데.”


현아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통쾌함을 느꼈다.


‘처자식 버리고 갈 때는 보란 듯이 잘 살 것처럼 그러더니 꼴좋네.’


언니는 엄마한테 전화 한 번 해보라는 말과 함께 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차키를 챙겨 나갔다.

현아는 식탁 의자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서 생각했다.


‘아빠가 죽었다고? 진짜 죽었다고?’


분명 언니의 입을 통해 들었는데 잠시 졸다가 꿈을 꾼 건 아닐까 의심이 되었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다시 한번 확인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괜히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마음을 접었다.

아빠가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현아는 무덤덤했다. 오히려 이제 누군가 아빠에 대해 물어보면 긴 설명 할 필요 없이 “돌아가셨어요.” 한마디만 하면 되니 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현아의 아빠 영수는 딸부잣집 유일한 막내아들이었다.

엄마와 일곱 명의 누나들이 만사 제쳐놓고 뒷바라지해 준 덕에 공부에 큰 뜻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대 교수가 되었다. 말 잘 듣는 착한 아들이었던 영수는 자기 엄마가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며 찾아낸 며느리감 명선과 6개월 만에 결혼했다.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 성격이 무던했던 명선은 주변 평판이 좋고 허우대 멀쩡한 영수가 남편감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수에게는 명선이 당시에 몰랐던 치명적인 단점이 몇 가지 있었다.

바로 술이라면 만사 제치고 달려 나간다는 것.

그리고 자기 엄마 말이라면 죽는시늉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영수의 어머니가 며느릿감을 고를 때 기준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자기 마음대로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착하고 성실한 여자라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아내 자리를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명선의 지옥 같은 시집살이와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호출하는 시어머니와 존재감 없이 착해 빠지기만 한 시아버지, 그리고 시어머니보다 더 미운 일곱 명의 시누이까지.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다며 결혼을 후회하던 명선은 남편에게 기대고 싶었다. 그러나 영수는 결혼생활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술과 혼연일체 되어 만취상태로 집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일주일 중 술에 안 취하고 멀쩡하게 들어오는 날이 하루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명선은 아이라도 낳으면 남편이 변할까 싶어 부단히 노력한 끝에 드디어 첫째 임신에 성공했다.     


하지만 명선의 기대는 곧바로 산산조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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