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 꽉 채워 6년, 햇수로 7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 나는 1년 뒤 퇴사하기로 결심했다. 23년 12월 31일. 합당할지는 모르겠지만, 이유는 많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소리일 수도 누군가에겐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겠다. 갈수록 취업이 힘들어 취직 준비만 몇 년째 준비하고 있는 친구들도 많으니까. 하지만,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퇴사 생각은 입사하고 한 달이 지난 즈음부터 계속 머릿속에 맴돌던 단어였기 때문에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적디 적은 월급을, 아침에 커피 한 잔 사 먹고 싶은 마음까지 꾹꾹 눌러, 모으고 모아 1억을 만들었다. 이제는 할 만큼 했다고,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한계점이다.
첫 번째 퇴사를 생각했을 땐, 2017년 즈음이었다. 나는 동기가 4명뿐인,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공공기관에 입사했다. 처음 4개월간 합숙하며 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교육 담당자는 꽤나 신입 직원들을 편애했다. 내가 한 질문은 멍청한 질문이었고, 다른 동기가 한 질문은 똑똑하고 뛰어난 질문이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했나보다 했다. 안전모를 쓰고 현장에 들어가 교육을 받을 일이 많았는데, 우리가 안전모를 쓰고 있다고 들고 있던 쇠막대기로 머리를 때린다던지, 기합을 주겠다며 나이 20대 중반의 신입 직원들에게 앉았다 일어났다 같은 얼차려를 시켰다. 손목을 쓰는 일이 많았는데, 엄살이라며 봐주지 않아 동기와 나는 병원 신세를 졌고, 아직도 손목이 시큰하니 자주 아프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큰 일화가 있기 전까진 말이다.
교육 일정 중에 다른 지역으로 참석해야 하는 일정이 있었다. 장소가 교통수단으로 가기 힘든 오지였다. 당시 자차가 없었던 나는 지도 앱으로 검색해 보며 이 경로가 나을지 저 경로가 나을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교육 담당자는 그 장소를 잘 알고 계시니 어떻게 가는 게 좋은지 여쭤보았다.
"썩은 동태 눈깔하고는, 그냥 퇴사나 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물론 내가 알아서 가야 하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신입의 짧은 생각으로 염치없이 물어본 걸 수도 있었다. 그냥 부모님께 태워달라 하거나 동기들끼리 모여서 거나 10만원을 내고 택시를 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담당자도 참석하는 마당에 신입집원도 겨우 5명이니까 우리를 챙겨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저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충격이었다. 나름 공공기관인데, 이래도 되나-하는 의문이, 공공기관이라 고인물이라 이렇구나-. 이래도 평생 다닐 수 있는 곳이구나-로 바뀌었다.
4개월의 교육이 끝나고, 본가가 대전이었던 나는 부산으로 발령이 났다. 희망 근무지를 조사하지도 않았고, 나의 의사는 묻지도 않았다. 겨우 출근 이틀 전에 통보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에 대한 교육 평가점수는 꼴등이었다. 주관적으로 태도를 평가하는 항목이 굉장히 낮았다. 그에게 나는 썩은 동태 눈깔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1년간 외로움 속에,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했다. 수습 기간에는 초과근무수당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수습은 3개월이었는데, 1년간 초과근무수당을 거의 받지 못했다. 몰랐다. 나는 너무 어렸고, 집에 혼자 있는 게 싫어서 차라리 야근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저녁 8시면 기절했고, 새벽 5시반엔 눈을 뜨고 모텔촌에 있는 내 작은 원룸을 나서서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회사로 향했다.
그리고 1년 뒤, 다행히 본가 근처로 발령을 내줬지만,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였다. 또 자취하는 건 싫으니 그냥 운전해서 다녔다. 연비가 7인 차로 왕복 3일이면 기름이 동났다. 그렇게 다니다간 월급이 동날 것 같아, 아버지한테 조르고 졸라 아버지가 타시던 경유차를 받았다. 12만km를 탄 차였다. 달달거리는 경유차 특유의 소리때문에 귀가 떠나갈 것 같았던 그 차로 3년을 다니면서 20만km를 채웠다. 새로 발령받은 곳도 상황이 다르진 않았다. 전국에서 업무가 top3안에 들 정도로 많은 곳이었고 야근이 없는 날이 없었다. 8시에 출근해 8시에 끝났고 가끔은 12시도 넘겨 다음날 집에 도착했다. 나는 점점 야위어갔다. 역시 초과수당도 다 못 받아 통장도 야위어갔다.
영혼 없이, 정신없이, 몸만 질질 끌고 다니던 회사에서 나는 2022년 11월, 회사 내 연구 발표에서 1등을 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조용히 주어진 일만 하는 직원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회사에서 눈에 띄는 직원이 된 것이다. 곧바로 나는 집에서 편도 30분 거리인, 모든 직원이 희망 근무지 1위로 뽑는 근무지로 발령받았다. 그런데, 그저 광역시에서 가까운 작업장이라 좋아 보였던 건지, 아니면 전에 일하던 분도 조용히 일만 하던 분이라 티가 안났던건지, 마찬가지로 지옥이었다. 정시에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아침 7시 반부터 저녁 7시 반까지 일했다. 역시 초과근무수당은 다 주지 않았다. 초과근무를 있는 그대로 보고해도 대체휴무를 권장했다. 공공기관이라서 인건비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초과근무수당 또한 모든 직원들이 공평하게 나눠갖도록 만든 제도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초과를 해도 초과수당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 집에서 출발해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15시간이라는 시간을 채웠다. 비도 오고 눈도 오는데, 밖은 시골이라 흔한 가로등조차 없어 차까지 걸어가는데 몇 번이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주머니에는 보온병이 있었는데 내 골반으로 몇 번이고 찍어 내렸다. 손목에는 까만 아대를 차고 말이다. 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이건 아니었다.
공공기관 특성상 근무지 전국구에 위치하고 발령이 주말을 포함한 3일 전에 발령을 낸다. 내가 가정이 생기면, 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나는 여자라서 더욱이, 가족과 멀리 떨어져 혼자 살며 일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관사도 이제야 몇 개 생겼지, 내가 신입일 땐 137만 원이라는 월급으로 42만 원이라는 월세에 10만 원이라는 관리비를 내야 했고, 그러고 나면 7만 원이라는 대전과 부산을 오가는 기차도 타기 부담스러웠다. 6년이 지났지만, 월급은 그리 많이 오르지 않았다. 여느 중소기업만큼 받을까. 20년 다닌 차장님과 팀장님도 대기업 신입 월급도 못 받는다. 그렇다고 사기업 직원들처럼 겸직도 하지 못한다. 어떻게 살라는 건지 모르겠다. 15시간씩 일하면서 말이다.
공공기관이니까, 철밥통이라고 나에게 부러운 눈길을 보내는 사람, 결혼하자고 쉽게 다가오는 사람,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며 야단치는 사람, 다양했다. 그런데 나는 공공기관이라서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굳건히 고인 물속에 위상만을 지키고 있는 그 기관에 있어야 할 이유는 더 이상 모르겠다. 2019년도에는 일하던 중에 욕설을 심하게 받다 보니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얻어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 증상은 완치되지 않아 말을 자주 더듬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곤 한다. '안정적이라서.' 이거 하나로 6년을 버텼는데, 안정적이라서 나에게 건강을 앗아갔고, 미래와 희망을 앗아가고 있다. 그래서 1년 뒤 퇴사하기로 결심했다.
솔직히 무섭다. 그만두면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 수 있을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래서 차근차근 부수입원을 만들고 필요한 것을 꼼꼼하게 챙겨서 퇴사하려고 시간을 갖기로 했다. 무턱대고 대책 없이 그만두는 게 제일 무서운 거니까. 오늘부터 퇴사 준비 일기를 써보려고 한다. 여기까지 읽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