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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 Feb 14. 2023

왜 퇴사해야 하는지 합리화해 본다

6년 간 같은 직장을 다니며 어떻게든 버텨야 된다고만 생각했다. 내 전공은 조금 특이해서 전공을 살려 일할 수 있는 공공기관이 우리나라에 몇 없다. 내가 다니는 곳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곳이고, 더 좋은 조건의 기관은 없기 때문에 어떻게 서든 버텼다. 이직을 하려면 사기업으로 가야 하는데, 고작 6개월 간의 취업준비기간 동안 대여섯 번 밖에 안 되는 취뽀(취업 뽀개기, 취업에 성공하기라는 뜻이다) 실패의 기억으로 망설여졌다. 전공특성상 남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노골적으로 불청객인 느낌을 꽤나 받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면접에서 주량이 얼마나 되냐는 질문 때문이었을까, 다시 영어 성적을 만들기 귀찮아였을까, 31살이라는 나이가 무서워서였을까, 그저 철밥통 회사에서 버티면 된다는 생각이 가장 컸을까. 핑계는 많았다. 그래서 한 기관에 몸을 담고는 눈을 감았다.


며칠 전, 15시간 일을 하고 집에 오니 12시가 가까운 시간이 되어있었다. 씻지도 못하고 포근한 내 이불속으로 겨우 기어들어갔다. 툭하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걱정스레 나에게 일이 많았냐고 물어보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이를 악 물었다. 울음을 참으려고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는지 모르겠다. 남들이 보면 숨을 거칠게 쉬었다고 했을까. 다시 시계를 보니 금세 12시가 넘어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끝나버렸다. 아니, 전날도 같았다. 하루하루가, 내 젊음이, 내 시간이 순식간에 증발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불을 꼭 쥐고 대성통곡을 해버렸다. 베개에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큰소리로 엉엉-울었다. 


잠들었는지 알았던 아버지가 깜짝 놀랐는지 안방과 거실, 동생방을 지나 벌컥하고 내 방에 들어왔다. 내 옆에 살며시 앉았는데, 나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못했다는 말이 더 맞겠지만. 


"회사 사람들이 괴롭혀? 괴롭히고 힘들게 사람이 있는 거야?"


아니었다. 사무실에 편하게 앉아 무관심으로 일조하는 간부들이 입으로만 '척' 하는 게 납득이 안되었을 뿐, 그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는 거라고, 그 사람들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와 실무를 함께 하는 동료들 사수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말도 안 되는 기관의 시스템을 함께 욕하고, 때로는 바꾸려고 힘을 모으기도 하며, 배려하고 또 배려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늦게 끝나서 그래? 내 시간이 없는 것 같아?"


반은 맞았다. 늦게 끝나서 싫었다. 의미 없는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내야 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내 시간이 없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반은 틀렸다. 그 야밤에 아버지를 걱정시키는 것도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아, 대충 그렇다고, 괜찮다고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그럼, 반은 뭐였을까. 왕복 1시간을 운전하면서, 가만히 현장에서 일을 할 때도, 점심휴게시간 동안 멍하니 생각해 보았다. 근데 그게 싫었던 거다. 운전, 현장, 휴게시간. 멍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싫었다. 


6년간 왕복 1~2시간을 운전하며 교통사고를 수도 없이 마주했다. 내 옆, 내 앞에서는 물론, 나도 2번이나 사고가 났다. 꽁꽁 언 빙판길에 미끄러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출퇴근 거리와 업체 점검 등의 출장이 잦아 나는 운전병인가 헷갈렸고, 비싸게 사비 들여 산 차는 소모품이 되었다. 신입직원에게 아무렇지 않게 자차 필수라고 요구하는 기관이 잘못되었는지 몰랐다. 버티고 버텨 6개월 간 자차를 구비하지 않는 직원은 크게 혼이 났고, 결국 자차가 없는 신입직원은 전례 없는 일이 되었다. 


우리는 현장직이라고 해도 이질적이지 않을 만큼 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오전엔 두세 시간씩 0도 냉장고에서 업무를 봐야 하고, 이후엔 급속냉동터널 앞에 가만히 서서 4,5시간씩 업무를 봐야 했다. 내 몸은 하루하루 얼어갔다. 냉기가 가시지 않아 여름에도 패딩을 입고 있어야 했다. 근골격계 질환, 난청이라는 질환은 우리에게 흔한 증상이었고, 여자 직원들은 유산도 잦은 편이었지만, 쉬쉬했다. 


현장에 서서 매일같이 똑같은 제품을 1천 개씩 보면서 나는 바보가 되어갔다. 무엇보다 내가 있는 작업장만 인당 1천 개였고, 다른 작업장은 4백 개면 퇴근했다. 업무강도 차이가 너무 심했지만, 간부들은 관심이 없다. 아무리 말해도 참으라고 어쩔 수 없다는 말 뿐이었고, 오히려 불만을 토로하는 직원은 소리소문 없이 멀리 발령이 나버렸다. '무사고-30일' 표지판이 자꾸만 초기화되고, 구급차가 들락거리는데도 말이다.


다른 회사에서 점심시간, 휴게시간이 길면 좋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4시간이라고 하면 어떤가? 11시 즈음되면 10분 만에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커피숍을 가려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하니 조용히 사무실로 들어온다. 그리고 3시까지 아무 일도 없다. 서무업무를 보지만, 우리는 현장일이 끝나야 퇴근할 수 있기 때문에 무한정 기다리는 것이다. 작업장이 고장 나면 그냥 무한 대기조가 된다. 작업장 소속도 아닌데, 파견 온 우리가 없으면 작업장이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내일 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물을 다루기 때문에 다음날이 되면 문제가 생긴다. 당일 업무는 당일 마감이 원칙이니, 퇴근 후 업무생각은 안 해도 되지만, 당일 업무가 끝나지 않으면 퇴근을 할 수가 없는 구조인 것이다. (전국에 있는 작업장마다 편차가 큰 편이라 근무환경이 좋은 곳도 있지만, 내가 근무했던 작업장은 대체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다.) 


간간이 작은 사업을 기획하고 제안할 때, 문서를 만드는 건 즐겁게 야근을 했다. 내가 해낸 결과물이 있다는 것, 인정받는 것,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것에 기꺼이 내 시간을 투자했고 수당도 신청하지 않았다. 그저 퇴근을 못해서 힘들다는 말은, 반만 맞는 거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는 지긋지긋한 운전, 위험하면서 내 통장까지 갈아먹는 운전 좀 그만하고 싶었다. 비싸게 내 돈 주고 산 하이브리드 차가 2년 만에 5만 km를 찍는 게 싫었다. 추운 곳에서 오랜 시간 보내면서 아프기 싫었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유산이라는 것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도 싫었다. 성취감, 보람, 성장이 없는 단순반복업무을 하며 냄새나는 현장에 있기 싫었다. 문 앞에 달려있는 '무사고-30일' 표지판이 자꾸만 초기화되는 것, 잊을만하면 구급차가 오는 것도 싫었다. 퇴근을 상사 눈치를 보며 못하는 게 아닌, 외부요인으로, 내 의지대로 퇴근을 못하는 게 너무나도 싫었다. 나에게 불안장애를 안겨준 민원인들과도 그만 마주하고 싶었다.(민원인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6년이면 할 만큼 한 거 아니냐고 매일같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물었다.


다음날 아버지께 장문의 카톡이 왔다. 힘들다고 들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당장 팀장님께 그만두겠다고 말하라고. 그만두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 천천히 하면서 시간 보내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이 두 줄 쓰는데 또 눈물이 나는 것 보면, 겨우 두 줄로 나는 위로를 받았고 위안을 얻었지 싶다. 그냥 내 편이 있다는 게, 당장 그만두라고 말해주는 게, 나는 감히 하지 못했던 말을 대신해 줘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조심스럽게 남자친구에게 퇴사의사를 전달했다.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것도 교제할 때 큰 부분이었을 텐데, 남자친구는 그런 회사는 안 다니는만 못하다고, 흔쾌히 퇴사하는 게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어차피 계속 다닌다면 평생 주말부부일 텐데, 조금 쉬면서 다른 걸 함께 생각해 보자고 했다. 항상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발전하려고 하는, 단단한 나를 믿는다고 했다. 이게 사랑인가 싶었다.(?)


후련했다. 숨통이 틔었다. 살 것 같았다. 똑같은 아침이 더 밝고 개운했다. 겨우 퇴사 결심 하나로 말이다. 여전히 내 마음은 갈대라서 퇴사해도 되는 건가 하루에도 수백 번씩 되묻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합리화해보고 있다. 수없이 합리화를 하고 나서야 겨우 나 이제 퇴사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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