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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Dec 02. 2016

아버지는 다들 어디로 떠났을까-<버려진 아들의 심리학>

                 


바다에선 항상 무언가가 돌아오기 마련이다.


학창시절에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 중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또는 엄마의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가 뒤늦게 가슴에 사무친다면, 성실하게 일하시던 아빠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눈앞에 생생하다면, 그건 정당한 상속을 받았다는 뜻이 틀림없습니다.


느닷없이 '상속'이라니,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소린가 싶으실 거예요. 잠시 이 책 한번 살펴보고 가실까요? <버려진 아들의 심리학>(마시모 레칼카티/ 책세상/ 2016년)은 세대 간의 불화를 대표하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대신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세대 간 유대와 소통을 상징하는 ‘텔레마코스 콤플렉스’를 제시하는 야심 찬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텔레마코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의 아들로, 트로이로 떠난 아버지를 20년 동안 오매불망 기다리는 아들계의 망부석(!)이라고 할 수 있죠.



텔레마코스와 어머니 페넬로페입니다. 집 나간 오디세우스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죠.


저자 마시모 레칼카티는 현대 사회의 아들들은 모두 프로이트가 아들 모델로 내세운 '오이디푸스'(즉, 아버지와 갈등하고 투쟁하는 아들)가 아니라 '텔레마코스'(즉, 아버지의 귀환을 기다리는 아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들은 다들 어디로 떠났을까요?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8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의 아버지는 니체가 5살 때 뇌경색으로 사망했습니다.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 9월 28일 ~ 기원전 479년)의 아버지 숙량흘은 66세에 십대의 아내를 통해 공자를 낳고 3년도 안 되어 죽고 말았고요.



니체(왼쪽)와 공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1955년 2월 24일~2011년 10월 5일) 역시 태어나자마자 양부모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직관적으로 버려진 아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죠.

 
네, 물론 저자가 말하는 버려졌다는 개념은 이렇게 실제로 부모를 여읜 경우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의 '아버지의 부재'는 물리적으로 아버지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아버지의 권위가 추락해 모든 아버지(부모)들이 부재하거나 아이의 주위를 맴돌거나 아이보다 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저자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가 ‘증발’한 이 시대에 우리는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해답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빠져 있지요.


오늘의 젊은 세대는 미래의 부재, 경험의 파괴, 욕망으로부터의 탈출, 죽음을 불사하는 쾌락의 노예, 무직, 빈곤이라는 상황에 처해 있다. (줄임) 우리의 자식들이 유산으로 물려받는 것은 왕국이 아니라 주검이며, 미친 경제와 끝을 알 수 없는 채무와 버려진 땅과 직업 및 비전의 부재뿐이다.


이 시대의 텔레마코스들은 삶의 인간적 모습에 '그렇다!'고 긍정적인 답을 제시해주는 아버지, 스스로의 삶을 통해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아버지를 이제나저제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프랑수와 드 페늘롱은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소설을 통해 아버지를 찾아 직접 모험을 떠난 텔레마코스의 흥미진진한 여정을 그리고 있기도 합니다.(그만큼 간절한 거죠. '아버지, 그만 집으로 돌아오세요!')


다행히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즉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인간적 삶이 무엇인지 전해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한 전승은 어떠한 하나의 사건에 의해 이루어지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영향력을 깨닫게 되지요.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잎사귀의 고통을 읽고 치료약을 준비하는 것이 아버지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신비로운 이름의 곤충과 곰팡이 때문에 썩어 들어간 잎사귀들을 치료했다. (줄임) 심리분석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나는 환자들이 하는 이야기에 담긴 주관적 관점의 독특한 구조를 발견하기 위해 항상 차별화된 진단에 심혈을 기울였다. (줄임) 나는 잎사귀에서 고통을 읽어내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내가 물려받은 유산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줄임) 우리가 유산으로 물려받는 것은 언제나 변화와 뒤틀림과 이탈을 경험하는 열정이다. 잎사귀의 고통을 읽는 것, 내가 오랫동안 해온 일이 비록 전혀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바로 고통을 읽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이런 것이 나는 상속이라고 생각한다.


즉, 저자는 눈앞에 캄캄한 바다만이 펼쳐져 있더라도 희망을 갖고 모든 자그마한 움직임을 주시하다보면 나에게 꼭 필요한 ‘증언’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상속’이지요. 상속은 꼭 아버지에게만 받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라도 텔레마코스의 바다에서 돌아올 수 있다. 어떤 노인이, 어떤 선생님, 어떤 어머니, 혹은 한 편의 문학작품, 한 점의 예술작품이 돌아올 수 있다.


우리가 간절히 바다를 바라보면서 기다리는 한, 우리에게 감흥을 주는 이 세상의 모든 것, 태도와 생활습관과 관점과 삶의 자세를 결정하는 모든 것이 다 '상속'인 셈입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아버지는 다들 어디로 떠났을까 - <버려진 아들의 심리학>]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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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장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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