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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Dec 08. 2016

"여자는 집에서 밥이나..." 아직도 이 수준이다

산골독서가의 세상읽기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이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장악했다. 라디오에서 관련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구례읍을 빠져나간 택시가 섬진강을 따라 달릴 때는 택시기사가 비슷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역시 여자들은 집에서 밥이나 해야지…. 아직 멀었습니다. 여자를 대통령으로 앉히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잖아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불똥은 이상한 곳으로 튀었다. 택시기사만이 아니다. 꽤 여러 남성이 "여자가 대통령이 된 게 문제"라고 말한다. 산골의 문화만이 아니다. 인터넷에서는 패러디랍시고,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사진을 붙여 아래 글자를 새긴 이미지가 널리 퍼졌다.

 
"쌍년을 체포해 가둡시다!"


좋게(?) 말하면, 두 여자를 처벌하자는 뜻이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있다지만, 여성 비하와 혐오가 아니면 저런 표현이 가능할지 궁금하다.

 
최근 많은 사상자를 낸 고속도로 버스 교통사고에서 운전자는 모두 남성이었다. 이때 "역시 남성은 운전대를 잡으면 안 돼!"라거나 "남자가 집에서 밥이나 할 것이지 괜히 운전를 해서 사람 죽였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일상에서 여성 운전자가 차를 천천히 몰거나 도로에서 능숙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 곧바로 여러 남성은 손가락질을 한다. 


"저거 여자지?"
"김 여사, 차 끌고 나와서 또 헤맨다!"


남성은 음주운전을 하고, 대량 사상자를 낳은 교통사고의 책임자여도 저런 말은 거의 듣지 않는다. '운전 미숙'이란 말은 들어도 "남성이 왜 운전을…." 따위의 존재 자체를 폄하하는 말은 듣지 않는다.

 
고작 자동차 운전을 두고도 이렇게 남성과 여성은 다른 평가를 받는다. 운전을 훨씬 능가하는 '국정 몰락', '국정 농단'의 주인공이 하필이면 두 여성(박근혜, 최순실)이니 세상의 괜한 손가락질은 상상을 초월한다.

 
'남성' 박정희가 18년간 독재를 해도, 전두환이 광주시민을 학살해도, 김영삼이 IMF를 초래해도, 이명박이 4대강을 망가뜨려도 "남성은 집에서 애나 봐야지, 무슨 대통령이야!" 따위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김대중의 세 아들이 비리에 연루됐어도, 노무현의 측근들이 불미스런 일로 교도소에 가도 "쌍놈들이 세상이 다 망쳤다"는 말은 거의 없었다.

 
이 세상에서 '최후의 인간'은 저 아메리카 대륙의 흑인 노예, 이 땅의 노비가 아니다. 여성이다. 제도와 절차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한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투표권을 획득한 이들은 흑인 노예가 아니다. 여성이다. 백인 남성은 저절로 투표권을 쥐었지만 여성은 100년 넘게 싸우고, 법정 투쟁을 거치고, 일부가 처벌을 감수한 뒤에 어렵게 투표권을 쟁취했다. 여성 참정권을 규정한 수정헌법 19조는 1920년에야 만들어졌다.

이 세상 '최후의 인간'은 여성이다

<세상을 바꾼 법정>(마이클 리프, 미첼 콜드웰/ 궁리출판사/ 2006년)은 미국에서 여성에게 투표할 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드라마처럼 생생하게 보여준다. 역사의 진보는 대개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한 개인의 영웅적인 투쟁으로 진보의 문이 열리기도 한다. 여성에게 열리지 않던 투표소의 문도 그렇게 열렸다.

 
수전 B, 앤서니, 바로 이 여성이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수전은 1872년 11월 5일 ‘불법’으로 투표소를 찾아, 역시 '불법'으로 투표를 강행한다. 이 일로 수전은 기소돼 정식 재판에 회부된다. 법정에 서기 전 수전은 야외에서 연설을 한다.

 

"헌법을 제정하는 것은 '우리 미국 국민'이지 '우리 백인 남성'이나 '우리 남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헌법을 제정한 것은 '자유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보장하려는 것'이며, '우리 국민의 절반과 자손의 절반’의 자유가 아닌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있습니다. 민주 국에서 자유를 보장받는 데 유일한 수단인 참정권을 빼앗긴 여성에게 '자유의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은 완전한 조롱일 뿐입니다."


수전은 재판에서도 심각한 차별을 받는다. 피고인이면서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증언이 거부되기도 한다. 수전은 "여성은 법률를 제정하는 데 참여하지도 않았는데, 그 법률은 여성을 처벌한다"며 다시 한 번 여성 차별을 따진다. 

법원은 그녀에게 "벌금 100달러와 재판 비용을 부담하라"고 선고한다. 투표를 했다는 이유로 유죄가 확정된 것이다. 18개월에 걸친 그녀의 법정 투쟁은 패했으나, 여론전에서는 승리했다. 그녀는 "두려움을 모르는 순교자 또는 도전적인 범죄자로 소개"됐고 "여성 참정권운동의 상징으로서 영원히" 역사에 남게 됐다. 


그녀의 뒤를 이어 여성 참정권 운동은 계속 번졌고, 약 50년 뒤에 여성은 자유롭게 투표소에 들어가 한 표를 행사하게 됐다. 흑인 노예는 1870년에 투표권을 행사했다. 미국만이 아니라 근대 민주주의 체계를 갖춘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여성은 어느 존재보다 가장 늦게 투표할 권리를 가졌다.


<세상을 바꾼 법정>은 여성 투표권만 다룬 게 아니다. 언론 자유의 상징이 된 '포르노 황제' 이야기, 존엄사의 새로운 장을 연 카렌 앤의 죽음, 흑인 노예의 슬픈 항해 아미스타드 선상 반란 등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된 역사적 재판 8개를 소개한다. 오늘날의 법치주의와 그 기원을 흥미롭게 맛볼 수 있는 책이다.

 
한국에서 여성 대통령은 미국보다 빨리 탄생했다. 그렇다고 여권이 남성과 같아진 건 아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그동안 여성들이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욕설의 세계'를 열었다. 투표권 하나를 얻기 위해 수십 년을 싸웠는데, 이 땅에서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권리를 누리려면 도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릴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한국 여성 인권의 처참한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여자는 집에서 밥이나..." 아직도 이 수준이다]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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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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