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최민석 작가 인터뷰
<베를린 일기>(최민석/ 민음사/ 2016년)는 고독의 산물이다. 낯선 이국에서 춥고, 외롭고, 음식은 맛없고, 딱히 할 일도 없고, 그런데 인터넷까지 안 될 때 작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쓸 수밖에.
최민석 작가는 2014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90일간 한 예술기관의 지원으로 베를린 자유대학에 머물렀다. 베를린에 도착해 '너무도 심심해' 시간을 때우기 위해 끄적인 글을 SNS에 올린 것이 시작이었다. '최민석 일기체'라는 유행어가 생기는 등 생각지도 못한 폭발적인 반응에 당황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 매일매일 쓰다 보니 어느새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됐다. 무릇 직업작가란 청탁이 없으면 글을 쓰기 힘든 존재이거늘, 60일이 지나서부터는 위기가 찾아왔으나 특유의 '오기'가 발동해 베를린을 떠나는 날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쓰게 된 것이다.
작가가 예술과 자유의 도시 베를린에서 쓴 일기라 하면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내면의 고독과 성찰, 유럽의 아름다운 풍광, 낯선 도시의 풍부한 역사적 지식, 여행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정보 등이 담겨 있을 거라 기대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리 밝혀두면, 이 책은 그런 인문학적이고 세련된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마흔이 가까운 싱글 남자이자 이름 없는 'B급 작가'가 인터넷도 잘 되지 않고, 가는 곳마다 ATM기가 작동하지 않으며, 드라이기는 고장이 나고, 기차는 매번 연착하는가 하면, 온수가 나오지 않아 찬물로 샤워를 하고, 술에 취해 택시를 타고 아우토반을 달리며, 물건을 살 때마다 '호갱님'이 되고 마는 지질한 일상이 마치 허풍과 풍자와 빈정댐이 그득한 그의 소설처럼 펼쳐진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온갖 기상천외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그의 일기를 보고 있노라면, 일기마저도 특유의 '구라'로 MSG를 잔뜩 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독자들의 마음을 꿰뚫어보듯, 여봐란 듯이 인증 사진을 들이밀며 일기의 내용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임을 증명하곤 한다.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를 골라서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 터. 일기마저도 소설처럼 느껴질 정도로 유독 좌충우돌 에피소드로 많다는 것은, 어쩌면 그에게 일상을 재미있게 만들어가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항문발모형(울다가 웃으면 어딘가에 털이 나는) 소설' 등의 수식어를 달고 다닐 만큼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매력은 <베를린 일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하지만 마냥 가벼운 이야기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베를린으로 떠나기 한 달 전 크게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변화된 삶과 사람에 대한 태도, '창비 신인소설상'으로 데뷔해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주목받는가 싶었지만 이후 발표한 작품들마다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으며 힘들었던 작가로서의 고민, 낯선 땅 낯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인간적인 이야기 등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책을 읽다 보면 '항문발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곳'이 살짝 뜨겁거나 간지러워지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니 독자 여러분은 유념하시라.
Q SNS에 베를린 일기를 연재할 당시 ‘최민석 일기체’라는 말이 유행했다던데?
일관된 형식이 있었다. 가령 첫 문장은 "이 글은 1유로짜리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쓰고 있다" 등으로 시작해 마지막 문장은 "베를린에서 첫 번째 날이었다"로 끝내는 식이다. 또 내 심정을 설명할 때 특정 인물들을 가져와 "OOO만이 내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같은 문장이 반복된다. 독자들이 댓글을 달 때나 태그를 할 때 이런 형식을 따라서 SNS에 올리더라. 또 글을 올릴 때 항상 다이어리에 손으로 쓴 다음에 사진을 찍어서 올렸는데, 그런 것도 따라서 하고. 오마주라고 하긴 좀 쑥스럽지만... 아무튼 그런 반응들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Q 직업작가가 청탁받지도 않은 글을 스스로 마감을 지키며 90일 동안 쓴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처음에는 정말로 심심해서 썼는데, 나중에는 족쇄가 돼서 첫날 일기를 왜 썼나 후회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귀찮기도 하고, 몹시 바쁜 날도 있으니까. 그런데 계속 쓴 것은 내 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또 쓰면서 재미를 느끼기도 했고.
Q 어떤 재미?
댓글 받아먹는 재미?(웃음) 사실 당시 많이 지쳐 있었다. 소설도 계속 시장에서 외면을 받았고. 내게 글을 쓰는 의미는 먹고살기 위한 생존 수단이었고, 노동이었고, 평가의 대상이었고, 비난과 조롱의 빌미였다. 그런데 이 일기는 누가 쓰라고 한 것도 아니고, 1원 한 푼 생기는 것도 아닌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쓴 거다. 그저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이랬다 저랬다 하며 자유롭게 쓰다 보니 글쓰기가 내게 일종의 걷기나 식사, 혹은 수면처럼 매일 치러야 일상이 가능해지는 대상으로 변했다. 이런 글쓰기 자체가 재미있었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사실 이걸 쓰면서 혼란이 오기도 했다. 내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풍의 역사>인데 완전히 망했다. 정말 열심히 쓴 작품이다. 그런데 이 일기는 아무 생각 없이 그야말로 붓 가는 대로 쓴 건데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거다. 공들여 쓴 건 안 되고, 그럼 막 써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그렇다고 막 쓸 수는 없고.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Q 베를린에서의 생활이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고 고백했던데.
베를린 가기 한 달 전에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다. 인간의 목숨은 유리잔처럼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람에게 필요한 건 오직 사람뿐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할까. 예전에는 멋모르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다면 베를린에 갔다 와서는 사람끼리 정을 느끼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내 문학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빈정거림이나 풍자 같은 걸 다시 쓸 수 있을까 걱정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나중에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을 쓰다 보니 다시 옛날 습성이 나오더라. 그때만 그랬나보다. 사람은 변하기 쉽지 않다.
Q 스스로 '항문발모형 작가'라는 수식어를 붙일 정도로 '재미있는' 소설을 추구하는 이유가 있나?
식상한 걸 싫어한다. 내게 있어 영화나 드라마나 문학에서 가장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식상함이다. 그런 걸 싫어하기 때문에 내 글에서도 그렇게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나만의 풍이 나오는 것 같다. 글을 쓰다가 내가 싫어하는 신파와 강요된 감정, 클리셰(상투어) 같은 게 나올 징조가 보이면 아예 더 도식화되게, 클리셰로 점철을 시켜 풍자하듯이 쓴다. 뻔하게 쓰지 말자. 뻔하게 쓸 거면 뻔뻔하게 뻔하게 쓰자. 애매한 신파, 어정쩡한 감정 강요는 철저하게 배제하자. 이것이 작가로서의 기본적인 모토다.
Q 뻔하지 않은 재미있는 소설을 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그러다 보니 글을 안 쓰게 된다. 삶이 길어지면 펜대가 자꾸 무거워진다. 삶이란 항상 슬프고, 가끔은 즐거운 날이 있는 법이다. 재미있게 쓰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소설가 최민석 "심심해서 쓴 일기, 재미와 혼란 느낀 새로운 경험"]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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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 이미회(북DB 객원기자)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