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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Dec 22. 2016

야구와 독립의 상관관계

루나파크 : 독립생활의 기록

 

'야구는 9회 말 투 아웃부터'라는 근사한 말이 있다. 하지만 사실 못하는 팀은 9회 말이건 99회 말이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저 탈탈 털리기 마련이고 막판 뒤집기 같은 극적인 순간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아예 없진 않다는 사실! 이제 정말 끝장이다 싶어 주먹으로 눈물을 훔칠 때 기적같이 모든 것이 뒤집어질 때가 있고 그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야구에는 홍콩 영화 주인공 같은 히어로도 있었다. 때로는 다른 팀에서 방출된 무명 투수가, 때로는 은퇴를 목전에 둔 노장이, 때로는 솜털 보송보송한 신인이 수십만 명의 슈퍼 히어로가 된다. 그것도 픽션이 아닌 실제 상황으로 말이다.

또 야구는 매일 다르게 연출되고, 매일 새로운 노래들로 구성되는 세 시간이 넘는 생방송 콘서트이기도 했다. 그것도 몇 달째 계속 이어지는 장기 공연. 텔레비전만 틀면 언제라도 볼 수 있는. 그렇게 나는 그토록 좋아해온 만화와 홍콩 영화와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 그 모든 것의 짜릿함이 한데 어우러진 프로야구에 빠져들었다.

좋아하는 것이라면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꿰뚫어야 하는 덕전자의 명령에 따라, 나는 시즌 중 펼쳐지는 모든 경기를 시구 장면부터 승리 팀 인터뷰까지 꿰지 않으면 조바심이 나 미칠 것 같은 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퇴근 후 한참 몰입해 야구 중계를 보고 있으면 엄마나 아빠가 나타나 한결같은 대사를 치셨다.

"아홉시 뉴스 보자."

이기느냐 지느냐 애간장이 끓는 판에 뉴스를 틀라니, 울화통이 터졌다.


"맨날 똑같은 뉴스를 뭐하러 봐?"
"너야말로 맨날 똑같은 야구를 뭐하러 봐?"

맨날 똑같은 건 뉴스일까, 야구일까.

부모님의 눈에 뉴스는 매일 새로운 소식이었고 야구는 매일 뻔한 승패였다. 나의 눈에 뉴스는 매일 그 나물에 그 밥이었고 야구는 날마다 충격적인 시나리오였다. 이 대립을 어찌 좁히랴! 나는 얹혀사는 입장에서 매일 결정적 순간에 방으로 퇴진해 휴대폰이나 컴퓨터의 툭툭 끊기는 화면으로 남은 경기를 관람해야 했다.

그 지경이 되자 나의 마음속에 낭만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 초여름의 어느 날, 길어진 햇살 속에서 귀가하는 나의 모습. 집에 오자마자 나만의 텔레비전을 켜고 파자마로 갈아입는 나의 모습. 야구 중계를 틀어놓고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캔맥주를 따고 적시타에 환호하는 나의 모습. 아홉시 뉴스가 시작되어도 채널 독점권을 가질 수 있는 나의 모습. 이 장면이 마음속에 구체화되자, 정말로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 낭만이 구체화됐다.

어쩌면 낭만이라는 것은 찍어본 적 없는 한 장의 사진일지도 모른다. 특정 장면으로 구체화된 하나의 소망. 나는 야구팬이 되어 맞이한 첫 시즌이 막을 내린 그 겨울부터 독립의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내년에 시작될 시즌은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텔레비전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 본 칼럼은 <혼자일 것 행복할 것>(홍인혜/달/2016)의 본문 일부를 편집한 글입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야구와 독립의 상관관계]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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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홍인혜(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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