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애인에게

by 인터파크 북DB

그동안 신인 작가의 전시를 기획했고, 백 명이 넘는 작가들의 오프닝 전시를 봤다. 갤러리에서 가장 많이 투자한 남미 출신 작가의 작품을 비싼 가격에 성공적으로 팔아 치웠다. <뉴욕타임스> 온라인판 '디아스포라 특집'에 그에 대한 완벽한 비평기사가 실리는 걸 확인한 새벽 2시에 사무실 의자에 앉아 축배를 들며 자축했다. 작가들의 작품들은 쉼 없이 파도처럼 밀어 닥쳤다. 당장 머릿속은 이미지들로 과부하 상태였다. 어떻게든 덜어내지 않으면 구토하듯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쉬는 시간에 나는 주로 책을 읽었다.


당연히 텍스트만으로 빼곡한 책이어야 했다. 대개 그것은 로렌스 블록이나 데니스 루헤인의 스릴러나 미스터리 소설들이었다. 줄거리를 따라 읽다보면 어느 순간 살인 사건의 현장에 도착해, 범인을 유추할 수 있는 특징적인 습관이나 생김새에 주목하며 범인 찾기 게임에 동참하게 되는 소설들 말이다. 범인은 결국 잡힌다는 점에서, 이런 소설들의 문장은 한결같이 박력적이었다. 그런 문장들 속에서 이미지를 상상하는 일은 내겐 늘 휴식 같아서, 책을 사는 행위를 포함한 독서 행위는 언제나 나를 집 밖으로 일으켜 세우는 활동적인 취미였다. 몸이 무거운 주말이었지만 서점에 나간 것도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을 사기 위해서였다.


맨해튼의 '반즈 앤 노블스' 서점에서 그를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길게 줄을 선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는 책을 들고 있었다. 솔 벨로의 <허조그(Herzog)>였다.

"닉 혼비가 아주 좋아하겠네요."


그는 내 농담에도 웃지 않았다.


그날 서점의 길게 늘어선 줄은 소설가 닉 혼비의 신작 출간 기념 팬 사인회의 줄이었다. 아침부터 그곳에 서 있던 닉 혼비의 광팬들은 저마다 가방과 손에 그의 책을 잔뜩 들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줄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통행에 방해가 됐다. '익스 큐즈 미'를 외치며 바쁘게 계단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점 2층 스타벅스 옆에선 닉 혼비와 독자들과의 짧은 대화가 시작됐다. 우리는 앉을 자리가 없어 뒷자리에 서서 그의 얘길 들었다. 닉 혼비의 얼굴은 자신이 쓰는 소설만큼이나 시니컬했다가 유쾌해지길 반복했다.


"<어바웃 어 보이>나, <피버 피치> 정도는 들고 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작가에 대한 예의가 전혀 없네요."

나는 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닉 혼비가 솔 벨로를 좋아한대요."


"설마!"


"아닌가?"


"닉 혼비 안 좋아하죠?"


"앞으로 좋아해 보려구요."


그가 나를 바라봤다.


"사실 오늘 처음 본 작가예요."


"그럼 여긴 왜 서 있었어요?"


"그쪽을 제가 봤거든요."


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내 귓속에 대고 속삭였다.


"175번가에서 지하철 타는 걸 봤어요. 그쪽 걸음이 워낙 느려서 얼굴 확인하고 금세 따라잡았죠. 그러니까 우린 175번가에서 14번가까지 함께 온 거네요. 근데 윗동네엔 무슨 일로 간 거예요?"


그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정말 궁금한 걸 묻는 사람처럼 그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 날 미행한 거예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미행이 아니라 우연인 거죠."


그가 정정하듯 내게 말했다.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입술에 손을 대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우리는 결국 서점을 나왔다.


뉴요커들이 배낭 안에 스니커즈를 넣고 걸어 다니길 좋아한다는 얘기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만, 지금의 맨해튼은 사실 걷기 좋은 도시가 아니다. 오래된 도시엔 보수해야 할 길들이 넘쳐 났고, '공사 중'이니 돌아가라는 푯말은 어디에서건 불쑥 튀어 나왔다. 환기 시절이 부족한 지하철역은 너무 낡아서, 깨진 계단을 잘못 밟았다간 앞으로 엎어지기 일쑤였다. 신호등을 열심히 지키는 사람은 관광객과 막 이곳에 도착한 유학생들뿐이었고, 그런 사람들은 뉴욕 뒷골목까지 어디에도 넘쳐났다. 그런데도 뉴욕의 사람들은 이 도시의 맥박이 차를 타는 것보단 걷기에 적합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잘 구획된 보도를 걷다보면 어떤 가게, 어떤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유니온 스퀘어의 '딘 앤 델루카' 매장 앞에서 나는 자신의 애완 당나귀를 끌고 가는 여자를 봤다. 휘청거릴 만큼 높은 빨간색 하이힐을 신은 여자는 맨해튼 한복판에서 당나귀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염소를 마켓에 데리고 나타난 유대인 남자가 비닐주머니를 든 채 담배를 사는 곳이, 이곳 맨해튼이었다. 대개 그런 비닐봉지 안에는 염소가 길을 걸으며 여기저기 싼 동그란 똥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맨해튼의 중심을 휘황찬란한 대형 기업 광고와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광고판들로 가득 찬 '타임 스퀘어'라고 생각하지만 내 중심은 언제나 유니온 스퀘어가 있는 14번가였다. 퇴근하면 그곳의 '트레이더 조'와 '홀푸드'에서 언제나 끼니를 위한 장을 봤고, '반즈 앤 노블스'와 '스트랜드'에서 필요한 책들을 샀다. 걷기 좋은 어떤 날은 '레지오' 같은 카페에 들러 카푸치노 한 잔을 사서 독특한 레코드 가게와 책방, 옷가게, 카페와 디저트 가게들이 즐비한 ‘블리커’까지 친구와 걸었다. 한국에서 온 친구나 손님들을 만날 때도 여러 개의 지하철 노선이 한꺼번에 모이는 이곳에서 만났다. 14번가는 뉴욕에서 가장 복잡한 환승역이었다.


"괜찮으면 저랑 좀 걸을래요?"


그가 말했다. 우리는 맨해튼 14번가를 함께 걸었다.


"혹시 할렘에 친구 있어요?"


그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교회에 갔었어요. 흑인 성가대가 있는데, 듣고 있으면 없던 신앙심이 생길 정도의 놀라운 성가에요."


"시스터 액터처럼?"


"비슷해요."


"교회에 다녀요?"


"어릴 적엔 다녔어요."


"지금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뉴욕의 가을이었다. 놀랄 만큼 전형적이었고, 전형적이라서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세계에서 로맨틱한 영화를 가장 많이 공급하는 도시답게 많은 연인들이 손을 잡고 이 도시의 가을 속을 걷고 있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애인의 애인에게]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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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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