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애인에게

by 인터파크 북DB

4.

"너를 미워하는 일. 이제부터 그게 내 새로운 직업이 될 거야."


집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무심코 말했었다. 성주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난 후, 6개월이 지난 어느 저녁이었다.


어떤 말은 예기치 않게 흘러나온다. 그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말이 끝나자마자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는 점점 크고 깊어졌다. 그는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그리고 비좁은 계단 쪽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계단 밑에 서서 그가 올라가는 걸 지켜보았다.


점점 그가 더 멀어져, 마침내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성주가 마트에서 사온 짐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우유와 요거트 아이스크림, 감자가 든 왼쪽의 종이봉투를 내려놓고, 오른쪽 손에 들고 있던 맥주와 과일 봉투를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가 바지 뒷주머니에 있던 열쇠를 찾아 열쇠 구멍에 넣고 돌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가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여는 모습이 그려졌다. 닫히려는 문을 왼쪽 발로 가볍게 막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을 다시 들어 올려 엉덩이로 문을 열며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보이지 않아도 그가 하는 행동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떻게 의자에 앉고 일어서는지, 어떻게 나이프를 쥐고 어떤 손으로 스테이크를 써는지, 지하철의 몇 번째 칸에 타는지, 아침을 시작할 때 그가 어떤 음악을 듣는지, 그가 하는 대부분의 행동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었다. 그가 나도 모르는 어느 곳에서, 나도 모르는 어느 여자에게, 나도 모르게 했을 말들까지도 말이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원치 않아도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 다 녹았겠다. 저녁 먹자! 안 올라올 거야?"


낮고 부드러운 성주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생각보다 일찍 찾아오는 깨달음 같은 건 없다고, 생각보다 늦게 찾아오는 이별이 없듯이. 누군가의 진심이 누군가에게 농담으로 들린다면, 그건 분명 잘못된 삶이라고. 그러므로 나의 삶은 완벽한 실패라고.



5.

화를 내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악담을 퍼붓는 게 아니라, 자주 지각을 하고, 매주 빨던 이불 시트를 더 이상 빨지 않고, 화장실 변기뚜껑을 닫아놓고, 주중의 섹스를 거부하는 것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전부 써버리기 때문에, 정작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서 무지하다. 이를테면 평소 하던 대로 야근을 하고 자주 가던 식당의 창가 자리에서 연어 샐러드를 먹고, 퇴근 길 집으로 돌아가는 L 트레인 안에서, 터무니없이 터져 나오는 울음의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회사 화장실이나, 방 안의 침대 위도 아니고, 어째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지, 누군가의 '괜찮아요?'라는 말이 어째서 조금도 괜찮지 않은지 말이다.


매주 화요일, 넉 달 동안 시간당 250달러를 지불하고 내가 알아낸 건 바로 내가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얘기해보죠. 본인은 '나는 화가 났다'라는 말을 '저녁에 중국음식을 먹었더니 소화가 안 된다'고 표현하는 사람이에요. 상대편이 뭔가 불편한 데가 없는지 물으면 걱정하지 말라고 하죠. 야근 때문에 잠을 못 자서 그렇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서요. 그리고 더 이상 상대편이 질문하거나 알아봐주지 않으면 그것에 대한 분노가 쌓이는 겁니다. 이런 심리 패턴을 가진 사람들이 특히 여성들 중에 많아요. 불안하다는 말 대신 손톱을 물어뜯거나, 폭식을 하거나, 필요 없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쇼핑하는 식이죠. 여자들은 몸짓 언어를 즐겨 쓰죠. 남자들은 '몸짓 언어'를 이해하는 데 천부적으로 재능이 없어요. 아주 젬병인 존재들이죠! 그건 남자들의 방식이 아니에요."


나는 의사를 바라봤다.


"내가 나를 너무 모른다. 그게 핵심인가요?"


"내재된 분노가 있어요. 하지만 자신의 분노를 분노의 대상이 아니라, 여기저기에 왜곡해서 투사하기 때문에 내면이 울퉁불퉁해져서 무의식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는 겁니다. 상황을 훨씬 더 복잡하게 만드는 거죠. 본인도 본인의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만큼."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세요."


"간단히 말하자면……."


의사가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바람 난 남편의 쌍방울을 잘라서 양쪽에 귀걸이로 걸고 싶은 거죠! 전쟁의 전시품처럼!"


그가 크게 웃었다.


"너무 심각한 것 같아서 웃으라고 한 말인데 안 웃네요?"


"안 웃겨요.”


"우울한 말은 원래 우습게 하라고 했는데……."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사실 정신과보다는 이혼 전문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는 게 정신 건강에 더 좋을 수도 있어요. 그쪽으로 끝내주는 악랄한 변호사를 한 명 아는데 원하면 소개해줄 수 있어요."


"돈 벌 생각이 별로 없으신가보네요."


"설마요. 정직한 거죠. 이것도 이게 제 직업윤리입니다."


나는 의사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안경 너머로 그의 눈빛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하고 싶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균열을 보고 싶어 했다. 화를 내거나, 울거나, 실소하며 터뜨리는 심리적 균열 상태 말이다. 의사가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나 역시 그를 바라봤다. 그가 내 상태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어떻게 규정하던, 나는 끝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생각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내 오랜 습관이었고, 버릇이었다. 어쩌면 악습이라 부를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던지는 유머의 대부분을 이해했지만 웃지는 않았다.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어요."


나는 침착하게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을 거예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이죠."


"하지만 화분에 물주는 걸 잊거나, 설거지를 무한정 쌓아놓는 건 피곤한 사람들의 특징 아닌가요? 맡은 업무가 평소보다 많으면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해야 할 일을 자주 잊을 수도 있고, 업무가 길어져 늦게 자다보면 평소와 다르게 지각을 할 수도 있는 거고."


"부재중 전화 숫자가 쌓여가는 걸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은 피곤한 사람은 아니죠. 일중독자도 아니구요."

그가 꿰뚫듯 나를 바라봤다.


"그럼 아픈 사람인가요?"


"자기감정을 왜곡시키는 사람이죠."


"왜곡이요?"


"견디기 힘드니까 무의식이 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 거죠. 분열, 해리, 방어, 투사 같은 정신분석의 용어들이 있어요. 본인은 방어기제를 특별히 자주 사용하는 경향이 있어요. 어린 시절부터 불안을 그렇게 해소했던 습관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특정 인형을 계속 끌어안고 자야 한다거나,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한다거나, 안 한다거나……."


"어렵네요."


"이렇게 설명하죠. 좋은 삶을 위해서는 방어기제가 성숙해야 돼요. 유머라던가, 승화가 대표적인 경우죠. 이별이나 죽음을 음악이나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거죠! 방어기제가 그런 쪽으로 바뀌면 회복력이 확실히 더 좋아져요."


"제 방어기제는 성숙하지 않다는 말로 들리네요."


"자신을 너무 괴롭히는 방식으로만 작동해요. 관계를 깨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원인을 돌리는 편이 더 익숙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습관적으로 ‘나에게는 분명 문제가 있다'로 시작해서 집요하게 자기 잘못을 찾아내는 거죠. 결국 상대편의 문제인데도 내 문제로 돌리는 게 익숙한 거예요. 그리고 그걸 '이해심' '착한 심성'이라고 착각하는 거죠. 상대에게 분노를 표출하면 관계가 악화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억압된 분노가 계속 다른 방식으로 왜곡되는 거예요.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을 겁니다. 시기심이나 질투심이 있을 수도 있어요. 뱀처럼 무의식이라는 동굴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거죠. 언제나 불편한 감정을 무의식은 가장 밑바닥에 꼭꼭 숨겨 놓으니까요."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애인의 애인에게]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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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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