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릴리 메이슨은 작가를 고르는 데 까다로웠다.
그녀는 이니셜의 첫 글자로 누군가를 지칭하는 걸 좋아했는데, J는 제리 헝틴턴을 가리켰고, K는 케빈 존슨, M은 마이크 린드버그를 지칭했다.
프랫을 나와 뉴욕과 시카고, 포틀랜드의 갤러리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그룹전과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개인전을 치른 J는 야망이 너무 많은 게 마음에 안 들었다(그런 사람은 언제든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파슨을 나와 매우 인상적인 개인전을 세 번이나 치른 K는 야망이 너무 없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그런 사람은 발전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하버드 로스쿨을 나오고 콜롬비아에서 MFA 학위를 딴 M은 자신이 가진 게 야망인지 열등감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그런 사람은 성공하고도 자기 콤플렉스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녀는 M이 호랑이와 고양이조차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마더 콤플렉스가 심하다고 진단했다.
릴리의 모든 말에는 '열정적인 큐레이터' 혹은 '노력하는 큐레이터' 같은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었다. 그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점을 반드시 알아야 했다. 생략된 목적어를 대입해 완전한 문장을 만들면, 그제야 "J 같은 사람은 언제든 자기를 키워준 큐레이터를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같은 릴리 메이슨의 온전한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성주는 릴리가 선택한 작가였다.
"성주는 중세인 같아. 뉴욕 같은 최첨단 도시에서 전혀 현대적이지 않다는 점이 독창적이야. 난 그게 참 마음에 들어. 부조화를 보면서 느끼는 기이한 조화로움 같은 거 말이야."
"그래."
릴리는 성주와 그의 사진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인상비평에 동의했다. 하지만 릴리가 말한 방식은 아니었다. 사실 그녀와 반대 지점에서 나는 성주를 중세인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뉴욕에 봄이 찾아왔다.
봄의 마디마다 그 이름에 맞는 꽃들이 차례로 피어났다. 꽃이 피어날 때마다 새들이 조금 더 활기차게 울었다. 날이 포근해지자, 릴리와 점심을 먹으러 자주 밖으로 나갔다. 공원에 심은 벚꽃이 피고 봄의 마지막 끝마디였다. 우리는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밥 딜런의 노래를 몇 번인고 듣다가 동전을 던져주기도 했다. 첼로 주자 한 명이 연주를 하다가, 곡이 끝나면 자신 앞을 배회하는 비둘기에게 먹이를 던져줬다.
"저 건물 보여?"
연어 샌드위치와 연어 샐러드를 번갈아 먹으며 릴리는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가장 잘 보이는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뉴욕 대학 건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리키는 붉은색 벽돌 건물이 NYU에서 학업 스트레스로 가장 많은 학생들이 뛰어내린 곳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언젠가 저 건물의 옥상 위에 자신이 한참 동안 서 있던 날을 얘기했다.
"그땐 정말 죽고 싶었거든."
그해 여름 릴리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아이를 낙태했다. 미혼모는 릴리 메이슨의 인생 옵션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릴리는 수술 직전, 의사에게 그 아이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물어보지 않은 게 종종 후회된다고 했다. 꿈에 자주 나오는 탯줄을 목에 감은 아기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악몽에 자주 등장하는 그 아기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캐리처럼 남자도 여자도 함께 쓰는 이름은 안 돼. 나는 조금 더 분명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짓고 싶어. '마리'라는 네 이름도 그렇잖아? 어떤 나라에서도 완벽한 여자 이름이니까. 난 마리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본 적이 없거든."
"아기가 보고 싶은 거야?"
나는 릴리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니!"
그녀는 단호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있는 힘껏 붙잡았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 어떤 식으로도 표정을 불어 넣어주고 싶었다.
무표정한 것보단 우는 쪽이 언제나 더 나았다.
그게 덜 아프단 유일한 증거였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애인의 애인에게]의 일부입니다.
☞ 전문보기
by 백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