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불안하다'거나 '두렵다'는 말을 '걱정된다'거나 '힘들다'는 조금 덜 감정적인 말로 바꿔 쓰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혼을 포기하고, 먼저 나를 미국에 보내 교육시키기로 결정한 순간, 인생의 많은 것들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바뀌었다. 엄마는 내게 울지 않는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나는 착한 딸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를 어떻게든 안심시키고 싶었다. 엄마의 소망대로, 어떻게 하든 울지 않는 아이가 무엇을 해도 웃지 않는 아이가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울지 않는 것보다 우는 것이 내겐 훨씬 더 힘든 일이 되었다.
아홉 살 때부터 나는 한인교회 목사 사택에서 자랐다.
목사님은 아빠의 중학교 친구였다. 그는 사업 실패 후에야 신학대학에 입학했고, 늦은 나이에 기독교에 입문한 만큼 교회 사역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밤마다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는 교인들에게 들려줄 설교문을 작성하느라 골몰했다. 그의 방에선 늘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누군가에겐 그 불빛이 어두운 밤길을 밝히는 교회의 십자가처럼 사랑과 소망을 상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꺼지지 않는 그 불빛이 24시간 사라지지 않는 감시의 눈길처럼 느껴졌다.
엄마와 아빠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하나님께 매일 기도했다.
찰스 디킨스 소설의 아이들처럼 고아가 되는 꿈을 자주 꿨다.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나는 '아멘'이라고 말하는 대신, '엄마'라고 말했다. 가끔 잊어버렸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아빠'라고 끝을 맺기도 했다. 그럴 날은 '아빠'라고 한 번 더 불렀다. 엄마가 나를 안아주길, 아빠가 내 손을 놓지 않고 꽉 잡아주길 매일 기도했다.
엄마는 3년 후, 미국에 들어왔다.
아빠가 한국의 일을 모두 정리하고 가족이 다 모인 건 열네 살 때였다.
우리는 맨해튼 시내에서 1시간 넘게 떨어진 플러싱에 살았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뉴욕의 플러싱에 정착했다. 그곳엔 뉴욕에서 가장 큰 한인마트가 있었고, 한국어 간판을 단 상점들이 즐비했다. 유학생들이 이곳을 한인들의 게토라 부른다는 걸 안 건, 훨씬 더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내 부모는 대부분의 이민자들처럼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일만 했다. 처음에는 마트에서, 그 다음에는 세탁소였다. 주말 없이 아침에 나가면 밤이 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애정 없는 부부의 삶에는 필연적으로 자식을 키우기 위한 돈이 종교처럼 깃들었다. 더구나 미국엔 노동을 신성시 여기는 청교도 문화가 존재했다. 자국에서 잘나가던 사람일수록, 반듯한 직장을 가졌던 사람일수록, 미국 생활을 힘들어했다. 누구나 그랬다. 그들은 미국 문화에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민자들은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더 제한적이고 폐쇄적이며 보수적으로 지냈다. 한국에서보다 한국 드라마를 더 자주 봤고, 한국 뉴스를 더 꼼꼼히 챙겼고, 없던 신앙심도 점점 더 자라나 새벽기도회를 빠지지 않고 다녔다.
우리는 뉴욕에 살았지만 실제 플러싱의 교회를 중심으로 우리가 사는 반경 10킬로미터 안의 풍경만이 온전한 부모님의 세계였다. 사람들이 뉴욕이라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그곳과는 별개의 공간이었다. 플러싱의 맥도날드에는 지팡이를 쥔 한국 노인들이 모여 커피 한 잔과 프렌치프라이를 시켜놓고 온종일 박정희 시절과 전두환 시절의 경제 부흥기와 한국에서 잘나가던 호시절에 대해 얘기했다. 그들은 지나간 세월을 그리워했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겐 현재는 참 따분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 그들은 지금이 아니라 언제든 과거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갈 수 있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애인의 애인에게]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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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