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애인에게

by 인터파크 북DB

열아홉 살의 내가 아홉 살의 나보다 덜 외로웠다 결코 말할 수 없다.


목사 사택의 8인용 식탁에서 열한 명이 앉아 식사를 했던 아홉 살 적엔 저곳에 의자 두 개만 더 갖다놓으면 엄마와 아빠를 앉힐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희망이 있는 한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 가정법의 세계 안에서 인간은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 아니, 행복해지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 간다. 문제는 희망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난 이후의 일이다. 간절히 원했던 부모의 존재가 나를 훨씬 더 외롭게 만들었다. 나는 곧 혼자 잠든 넋과, 넓은 식탁에 혼자 앉아 냉장고에 든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일과, 혼자 사춘기를 맞는 일에 익숙해져야 했다.


한국에서 실패한 이민자의 딸이 자기 존재를 인정받는 유일한 방법은 하버드나 컬럼비아 대학에 들어갈 정도의 뛰어난 학업 성적을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아이비리그 입학이 아메리칸 드림의 첫 번째 열쇠였다. 부모들 간의 경쟁도 대단했고, 아이들 간의 시기심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곳 이민자 출신의 아이들이 겪는 학업 스트레스는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슷한 이유로 이민 2세대의 아이들은 보통의 미국인들보다 조숙했고, 더 빨리 결혼을 선택했다. 대부분은 부모들이 맹렬히 돈을 버는 동안, 어린 시절에 생긴 필연적인 결핍 때문이었다. 부재했던 부모에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안정적인 둥지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것 말이다. 그렇게 몇몇 외로운 여자아이들은 아직 성욕과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린 남자들과 뜨거운 연애를 한다. 뜨거웠던 만큼 차갑게 식는 것이 사랑이란 걸 깨달았을 땐, 스물 대여섯 살에 이미 이혼녀란 꼬리표를 달고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뜨거운 연애, 잘못된 선택, 예정된 실패'는 그나마 덜 나빴다.


'연애, 빠른 결혼, 조금 더 빠른 이혼'은 조금 더 최악이었다.


그것은 조금만 건드려도 속도를 늦출 수 없는 도미노처럼 짧은 시간 안에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것은 일종의 '패턴'이 되었고, 이민자 아이들의 세계 안을 떠돌았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연애에 각별히 민감했다. 외국인과의 결혼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중한 경고와 감시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들은 사고처럼 발생했다. 스스로를 납득하기 위해 나는 나를 개별적 개인이 아닌, 한 집단의 표본 구성원으로 철저히 분리해야만 했다. 가족에게조차 비밀이 된 결혼과 이혼은 그렇게 해야만 간신히 감당되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그토록 멀리까지 달아나고 싶었지만, 나는 한 집단의 전형적인 패턴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지루한 삶을 살고 있는 끔찍하게 지루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한 달 전, 성주의 변호사가 릴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호사는 릴리에게 혹시 우리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지 물었다. 영주권 심사나 이후 진행될지도 모를 추방재판 때, 그를 위해 증언하거나 도와줄 수 있는지의 여부도 물었다.


"변호사 착수금만 7천 달러래. 성공보수 5천 달러는 별도고. 성주한테 상담이 필요하면 전화가 아니라 무조건 이메일을 쓰라고 했어. 변호사들은 시간당 페이를 받는다고. 전화 한 통 한 것까지 전부 시간으로 계산해 비용 처리 한다니까. 특히 이민법 전문 변호사들은 신분이 불안정한 사람 약점 잡아 물고 늘어지는 데 선수거든."

나는 그의 번호가 찍힌 부재중 전화를 떠올렸다. 13번째까지 숫자를 세다가, 배터리를 뽑아 버렸다.


"가난한 외국인 예술가가 무슨 돈이 있겠어? 성주가 한국으로 추방당하는 건 우리한테도 좋지 않아. 마리 네가 괴롭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공과 사는 분리해야 되잖아."


그것은 사실상 부탁이 아닌 요청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침묵을 깊게 오해할 것이란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해서 생기는 오해보단, 말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오해 쪽이 조금 더 수월했다.


나는 창가에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봤다. 창문 사이에 맺힌 빗물이 초점이 나간 사진처럼 뿌옇게 보였다. 성주라면 창밖 풍경에 '2인칭 눈물 시점' 같은 멜랑콜리한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마리, 내 말 듣고 있어?"


릴리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내게 몇 번이고 다시 되물었다.


"듣고 있어."


나는 분명히 그녀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너무나 잘 듣고 있었기 때문에 릴리가 성주를 진심으로 생각했다면, 지금처럼 말하지 않았을 것이란 것도 잘 알았다. 만약 그녀가 성주의 추방을 염려했다면, 그녀는 이런저런 걱정을 쏟아내는 대신, 그의 아티스트 비자를 위해 즉각적인 행동에 돌입했을 것이다. 그녀가 개인이 아닌, 회사의 아트 디렉터로 나서 그의 재정과 복잡한 신원문제에 대해 보증한다면, 그는 안정적으로 뉴욕에 머물며 원하는 만큼 활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애인의 애인에게]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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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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