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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an 10. 2017

나는 불멸의 영혼을 타인의 사랑에 의존해 얻게하지않았어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

                          

<인어공주>(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비룡소/ 2005년)

인어공주의 사람 보는 눈은 어떻게 봐야 할까. 하기는 일이 그렇게 되고 만 게 어디 인어공주가 사람을 잘못 봐서겠는가. 모든 파국의 죄가 어디 사람 잘못 본 눈에만 있겠는가. 무엇보다 자기 눈을 의심해가며 빠지는 사랑이 사랑이겠는가.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자.

일고여덟 살 무렵이지 않았나 싶다. 밖에 나가 친구들하고 놀기보다 방에서 혼자 책읽기를 좋아하다보니 부모님이 꽤 많은 책을 책장에 꽂아주셨는데 동화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 독서 이력은 한글을 뗀 후에 곧장 청소년 문학으로 넘어간 셈이다. 그러다 외사촌네 놀러갔다 읽은 안데르센 동화집은 가히 신세계였다. 그처럼 황홀하게 예쁜 그림이 들어간 책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그 집에 머무른 1박 2일 동안 계속 그 책만 붙잡고 앉아 읽고 또 읽었다. 다음에 놀러갔을 때도 또 그 책을 찾아 읽었다. 좋아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예쁜 책이 당최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공주와 완두콩>, <인어공주>가 바로 그 문제작이었다.

아! 내가 사랑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면 인어공주 탓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고 진심을 다해 사랑했는데 대가가 고작 물거품이라니,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다 있나! 지금이라면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는 것으로 끝나도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의 끝이 물거품인 건 현실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권선징악을 철썩 같이 믿고 있던 그때 인어공주의 결말은 가히 반역이나 다름없었다. 작은 뇌 용량으로 어떻게든 권선징악과 꿰어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천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물거품이라니, 가끔 갖고 놀던 비누거품놀이의 그 거품 같은 거라니, 인어공주가 너무 가엽고 억울했다. 내게는 너무 나쁜 안데르센이었다. 

그렇게 인어공주는 아름답지만 이상한 이야기로 남았고, 십수 년이 지나 제대로 된 번역본을 읽은 후에야 미스터리를 풀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출판사와 번역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과도한 축약본은 독서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독자들이 나처럼 심각한 편견을 가질 수 있음을 밝힌다. 이 경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다. 번역본으로 2,400쪽 가량이다.

<장발장>으로 번역된 축약본이나 영화는 빅토르 위고의 작품으로 보기 힘들다. 이제 누구나 다 아는, 그러나 잘 모르는 인어공주 이야기를 해보자.

인어공주는 왕자를 사랑했다. 한 사람이 한 세상이니,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또 다른 한 세상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사랑은 지금까지 관심조차 없던 세상에 대해 묻게 만든다. 인어공주는 모르는 게 없는 할머니에게 사람에 대해 물었고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에게는 죽지 않는 영혼이란 게 없어서 다시 태어날 수가 없어. 푸른 해초같이 한 번 잘리면 다시는 꽃을 피울 수가 없지. 반면에 인간에게는 영원히 사는 영혼이란 게 있어서 몸이 먼지로 변한 뒤에도 다시 살 수 있단다. 그 영혼이 깨끗한 공기를 뚫고 올라가 빛나는 별까지 올라간다지!" (p.27) 

인어공주가 슬픔에 잠겨 다시 묻는다. 죽지 않는 영혼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냐고. 할머니가 답한다. 

"없어. 한 사람이 제 부모보다도 더 널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면 모를까. (중략)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어. 인간들은 우리의 아름다운 꼬리를 흉하다고 생각하니까." (p.27)

인어공주에게 소원이 생긴 것은 이날부터였다. 그 소원이란 왕자의 사랑을 받아 죽지 않는 영혼을 얻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인어공주의 지난한 여정은 왕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지 않는 영혼을 얻기 위해서, 로부터 출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왕자가 선택한 여인은 이웃나라 공주였고 인어공주는 거품이 돼버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전혀 죽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밝은 해가 보이고 영광스러운 천사들이 수없이 떠났어요. 투명한 천사들 사이로 배의 하얀 돛도 보이고 하늘의 붉은 구름도 보였어요. 그들의 말은 아름다운 음악이었고 영혼 같은 것이어서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었어요. 지상의 눈으로는 볼 수도 없었지요. 천사 들은 날개도 없이 하늘을 날아다녔어요. 인어공주는 자기도 똑같은 존재가 돼 거품에서 빠져나와 점점 더 높이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p.45)

어렸을 적에 읽은 인어공주는 대략 이 즈음에서 얼버무려졌던 것 같다. 독자로서는 어쨌든 거품이 됐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남은 이야기가 있었다. 인어공주가 묻는다.

"저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답이 들려온다. 

"공기의 딸들에게요! 인어에게는 죽지 않는 영혼이 없어서 인간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그 영혼을 얻을 수 없지요. 인어가 영혼을 얻으려면 다른 이의 힘이 필요해요. 공기의 딸들도 마찬가지로 죽지 않는 영혼 같은 것이 없어요. 하지만 착한 일을 해서 영혼을 얻을 수 있죠. 우리가 300년 동안 착한 일을 하면 우리는 사람의 영원한 행복을 같이 나눌 수 있는 불멸의 영혼을 얻게 되지요. 가여운 인어공주 님. 당신도 우리처럼 온 마음으로 노력했어요. 고통을 받고 그걸 참아 냈지요. 그런 착한 노력 덕분에 천사의 세상으로 올라오게 된 거예요. 이제 당신도 300년이 지나면 죽지 않는 영혼을 얻을 수 있어요." (p.45)

인어공주는 소원을 이루었다.

우리가 사랑을 원하는 이유는 인어공주가 죽지 않는 영혼을 갖고 싶어 했던 갈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영혼의 생사가 육체의 생사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육체가 살아있어도 영혼이 죽은 사람이 있고, 육체가 죽어도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사랑을 갈망하는 이유는 영혼을 생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를 어둠에서 밝음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끌어올려주고 구원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런데 안데르센은 <인어공주>에서 죽지 않는 영혼을 가질 방법이 사랑의 완성에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지 않았다. 왜였을까. 인어공주의 집필을 마치고 친구에게 쓴 편지에 이런 구절이 들어있다
.
"나는 내 인어공주가 푸케의 운디네처럼 불멸의 영혼을 타인의 사랑에 의존해 얻게 하지 않았어…. 그런 식으로 영혼을 얻는 건 운에 달린 거야."

인어공주를 쓸 당시에 안데르센은 첫 번째 사랑도, 두 번째 사랑도 잃은 후였다. 그는 타인의 사랑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런 식으로 무언가를 얻는 것은 운에 달렸다는 사실을 이별을 통해 배웠다. 타인의 사랑에 의존하는 내 사랑, 내 영혼, 내 인생이라면 너무 불안하지 않은가. 내 의지와 상관없는 운에 달렸기에…. 혹시 그래서 내 사랑이, 내 영혼이, 내 인생이 불안한 것은 아닐까. 인어공주는 사랑을 실행함에 있어 주저함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왕자에게도, 운명에게도 맡기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은 한 순간도 불안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처럼 슬펐을 뿐.

※ 본 연재는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유선경/ 샘터/ 2016년)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나는 불멸의 영혼을 타인의 사랑에 의존해 얻게 하지 않았어 ]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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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유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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