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칼럼

큰 소리로 우는 상자

루나파크 : 독립생활의 기록

by 인터파크 북DB


2017011909345227.jpg

새집으로 이사 가서 별다른 세간 없이 독립생활을 시작하다보니 그야말로 나의 집에는 없는 것투성이였다. 내가 그동안 ‘집’이라는 곳에 응당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실은 돈을 내고 사야 하는 것이었다.

육면체의 콘크리트 공간일 뿐인 이곳을 집답게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한 쇼핑이 시작됐다. 생필품만 사들이는 데도 너무 많은 돈을 쓰다보니 마음이 더없이 가난해졌다. 구멍난 소금자루를 짊어지고 빗길을 걷는 기분, 자산이 줄줄 녹아나는 기분, 숨만 쉬어도 돈이 줄줄 새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보니 별수없이 가격 대 성능 비를 생각하게 되고 오래 진득하게 쓸 수 있는 ‘좋은 것’보다는 일단 당장의 불편만 해결해주면 되는 ‘싼 것’을 택하게 됐다. 조악한 가구들과 엉성한 가전들로 집이 채워졌다. 그럼에도 전세금이 뭉텅 빠져나가 큰 구멍이 생긴 통장에 자잘한 구멍들이 연이어 뚫렸다.

그렇게 내 영혼이 빈궁의 클라이맥스일 때 마지막까지 미루던 세간인 냉장고를 사야 하는 순간이 왔다. 도저히 신제품은 무리야! 나는 중고제품을 사기로 정하고 인터넷 중고거래 커뮤니티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멀끔해 보이는 냉장고에 마음이 기울어 조심스레 전화를 걸었더니 중고가전 업자가 받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가 사진으로 보고 점찍은 그 냉장고는 ‘방금’ 팔렸다고 했다.

"그거 말고 딱 그만큼 깨끗한 냉장고가 있긴 있는데…… 가격은 똑같고요. 아직 인터넷에 사진은 못 올렸어요."
"그래요? 어느 회사 몇 년도 제품인가요?"
"삼성전자예요. 한 5년 됐나?"
"제가 사겠습니다."

당시 난 만사가 귀찮은 상태였다. 그저 어서 이 지난한 살림 갖추기 퀘스트를 돌파하고 싶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번개같이 돈을 입금했다. 사진 한 장 보지 않고 구두로 계약을 끝내다니! 내가 너무 경솔했나? 하지만 아니었다. 경솔 레벨이 아니었다. 초특급 등신 레벨이었다.

이틀 후에 용달 기사 아저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우리 집에 냉장고를 짊어지고 나타났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이라 송구해하며 음료를 대접하고 배치할 곳을 알려드렸다. 냉장고가 제자리에 놓이고 그제서야 녀석을 뜯어보는데 맙소사, 냉장고가 한눈에 봐도 너무나 낡았다. 당황해서 살펴보니 문 안쪽에 회사와 연식이 표시되어 있었다. 93년도에 만들어진 주식회사 금성사의 제품이었다! 금성사! 골드스타! 93년식! 냉장고가 무려 이십대 초반! 선거권도 있는 나이!

곧바로 업자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만 듣던 중고사기를 당하다니!

일단은 닥친 일, 나부끼는 정신줄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나니 일단 이놈이 제대로 작동이라도 되는지를 알아야 했다. 냉장고는 이렇게 이동 과정을 거치고는 한두 시간 후에나 켜봐야 한다고 들었기에 당장 켜볼 수도 없었다.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두 시간을 보냈다. 밤이 이슥해져서야 마침내 냉장고의 전원을 켜니…… 지난 세기부터 품어온 원한이 가슴 밑바닥에서 들끓는 듯 냉장고가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소음이 시작됐다. 좁디좁은 집에서 냉장고가 밤새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마음 같아선 냉장고보다 더 큰 소리로 울고 싶었다.

이럴 수가. 이렇게 사기를 당하다니. 경솔했던 내 탓일까?

그후로 지속적으로 연락한 끝에 겨우겨우 업자와 연락은 닿았지만 그는 애초에 내가 사기로 한 게 이것이었다며, 자기는 삼성전자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모든 거래가 구두로 이루어진 나머지 우리 사이에 계약서도, 문자 한 통도 남은 게 없었기에 나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좋게 말하면 빈티지 냉장고, 엄밀히 말해 언제 숨을 거둬도 호상인 고령의 냉장고를 갖게 됐다. 시끄럽지만 다행스럽게도 냉장과 냉동 기능만은 별 이상이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나 이 글을 쓰는 이 시점까지도 그 냉장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년째 녀석은 내 부엌 한켠에서 쿨럭쿨럭 기침을 하기도 하고, 큰 소리로 으르렁대기도 하며 존재감을 뽐낸다. 냉장고를 볼 적마다 속이 터지곤 한다. 늙은 냉장고의 속에서도 소음을 넘어서, 이따금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난다. 우리는 서로 뻥뻥 속이 터져가며 이렇게 함께 살아가고 있다.

* 본 칼럼은 책 <혼자일 것 행복할 것>의 본문 일부를 편집한 글입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큰 소리로 우는 상자]의 일부입니다.

전문보기



글 : 칼럼니스트 홍인혜(루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BBC 드라마 '셜록'보다 원작이 좋은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