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독서가의 세상읽기
다음 주에는 시골 마을 곳곳에서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일 거다.
"친지 여러분들의 고향 방문을 환영합니다."
평소와 달리 곧 마을 골목길에서는 개, 고양이보다 사람이 자주 보일 거다. 염소 울음소리보다 사람 목소리를 흔히 들을 수 있을 거다. 1년에 단 이틀, 시골 마을이 북적(?)대는 그날이 다가온다.
지리산 아래, 전남 구례 피아골은 1년 365일 중 330일 정도 평온하다. 어딜 가든 조용하다. 때로는 적막한 느낌마저 든다. 구례는 인구 3만 명이 안 되는 농촌이고, 노년층이 다수를 차지하기에 더욱 그렇다.
매화, 산수유, 벚꽃이 피는 봄날 며칠, 뜨거운 여름 며칠, 잎이 물드는 가을 며칠을 제외하면 군중이라 불릴 만한 사람을 구경하기 힘들다. 그래도 추석, 설날에는 마을마다 활기가 돈다. 이때가 되면 풍문으로 들어온 마을의 역사가 나름 정사(正史)라는 게 어렴풋이 느껴진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마을의 작은 초등학교에 학생이 수백 명이었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지금은 전교생이 20명 남짓이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5~6명이 있어 동네가 시끌벅적했다는 전설 같은 사연(지금은 사람 사는 집이 5~6채인 마을도 있다), 진흙투성이 논바닥에서 아이 팔뚝만 한 장어를 잡았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요즘 피아골에는 논 자체가 없다) 등 말이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을 이야기할 때면, 마을 어르신들의 눈은 반짝반짝 빛난다. 침은 평소보다 더 많이 튀어나온다. 지리산에서 평생을 살아온 어르신들의 입은 때로 상상력을 북돋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논에 사는 장어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지 것’들에겐 더욱 그렇다.
우리는 지금 "왕년에는 말이야…"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순식간에 '꼰대'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사실 대개의 사람은 왕년의 경험에서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지만, 비상식량처럼 추억을 곱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집단적으로 비상식량을 풀어내고, 그걸 또 함께 나눠먹는, 거대한 주술적 행사. 명절은 그런 날인지도 모른다. 각자 나고 자란 땅으로 돌아가 과거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증오하고, 즐기는 의식. 누구는 화해할 수 없는 과거와 싸우고, 누구는 지난 시절의 잘못마저 무용담으로 치장하여 여러 사람을 집중적으로 괴롭히는 날이 명절이기도 하다.
왜 우린 꽉 막힌 고속도로의 교통체증을 견디면서, 그 소중한 연휴에 집에서 쉬지도 않고, 굳이 고향으로 가는 걸까? 어쩌면 우린, 과거의 어느 순간을 확인하기 위해 그 고단함을 견디는 건지도 모른다. 타임머신이 없어 미래로 갈 수 없기에 인간은 지나간 경험과 기억의 힘으로 내일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존재다.
과거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서는 사람들의 손에는 대개 선물 꾸러미가 들려 있다. 많은 이들은 과일, 소고기, 햄, 치약 선물세트 등을 주고받는다. '왜, 굳이, 지금 이런 선물을 주고 받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갑자기 아픈 과거(?)가 떠오른다. 직장에 다니던 시절, 그때 나는 이미 대머리였다. 남들이 샴푸 한 통으로 3개월을 쓸 때, 나는 3년을 쓴다. 그럼에도 회사는 한동안 명절 때마다 샴푸-치약 선물세트를 내게 선물했다. 정말이지 사장실로 찾아가 "내게 감정 있습니까?"라고 묻고 싶었다.
많은 사람이 집단적으로 과거를 향해 달려가는 명절, 아예 '지나간 시절', '잃어버린 시간'을 선물하면 어떨까? 책, 그 중에서도 성장소설 같은 거 말이다.
그동안 내가 타인에게 가장 많이 선물한 책은 심윤경이 쓴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다. 난독증이 있는 소년 동구의 일상과 가족의 모습을 잔잔하게 그린 소설. 동생 영주의 죽음이 주는 슬픔, 엄마와 할머니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할머니를 선택(?)하는 속 깊은 동구가 주는 감동의 울림이 큰 작품이다.
이 책이 아니어도 좋은 성장소설은 많다. 임철우가 쓴 <그 섬에 가고 싶다>,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 장르가 조금 다른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이문열의 <젊은날의 초상> 등.
사람은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 나의 미래, 우리가 살아갈 날이 궁금하면, 힘들게 타임머신을 개발해 그걸 탈 궁리를 할 게 아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 어차피 힘들게 과거로 돌아가는 명절이라면, 서로에게 성장소설 한 권씩 선물하면 어떨까 싶다.
자신의 경험과 과거를 타인에게 강요하면 꼰대지만, 스스로 조용히 '자기만의 왕년'을 곱씹어 본다면 성찰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점쟁이를 찾아가지 않아도 미래를 조망할 수도 있을 거다.
안 그래도 한 서적 도매상의 부도로 출판계가 더욱 추운 겨울을 보낸다는 소식이 이 산골까지 들려온다. 책을 읽으면서 지금의 나를 만든 ‘자기만의 정원’으로 돌아가보면 어떨까 싶다.
명절이 지나면 시골 마을은, 오래된 집은, 그 집처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어르신들은, 다시 공기같은 고독을 고요함을 마시면서 일상을 견딘다.
얼핏 보면, 책을 읽거나 글을 쓰려는 사람에겐 좋은 환경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공부할 의지나 이유가 없을 때 독서실의 조용한 공기만큼 견디기 힘든 것도 없다는 걸.
책을 펼치게 만드는 힘은 무료한 공기에서 오지 않는다. 앉은 자리에서 다른 세계로 진입하고 싶거나, 모르는 걸 알고 싶을 때 우리는 책을 펼친다. 그러니, 소란스런 명절에 무슨 독서냐고 묻거나 따지지 마시길. 사람 많고, 때로는 술 취한 아저씨의 괜한 주정이 리듬처럼 들리던 덜컹이는 전철 안에서 많은 책을 읽은 당신의 과거를 잊지 마시길.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대머리에게 샴푸 선물... 이게 뭡니까]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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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