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칼럼

그저 먹고 자라나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거야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

by 인터파크 북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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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에게 희망을>(트리나 폴러스/ 시공주니어)

1980년, 그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외삼촌은 시골 출신 유학생에 복학생이었다. 애들 셋 딸린 누나 집에 얹혀산다는 것이 적잖이 눈치가 보였을 것이다. 몸 하나 오롯이 의탁할 곳 없고 시골에서 부쳐오는 생활비는 늘 빠듯하고 시절은 수상하고…. 그때 젊디젊던 외삼촌은 얼마나 날아오르고 싶었을까. 내게 공부하라며 엄마보다 더 잔소리를 해댄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너는 나보다 좋은 환경에서 시작했잖아. 그러니까 높이 날아올라야지. 우리 같은 사람한테는 그럴 수 있는 방법이 공부 밖에 없어.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방법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해서 심지어 엄마에게 이르기까지 했다. "누나! 선경이는 책상 앞에 그냥 앉아만 있어. 공부는 안하고 공상만 하고 있다니까!" 당연히 외삼촌이 미웠고 그래서 따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외삼촌이 노란 책 한 권을 건네주면서 "읽어봐라~" 했다. 웬일로 꼭 읽어야 한다는 강압도, 도움이 될 거라는 충고도 없이 그저 그 한마디였다. 그 후 열 번이 넘도록 이사할 때마다 행여 이 책을 잃어버릴까봐 특별히 챙긴 것은 외삼촌에 대한 그 애틋한 추억 때문이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제목 옆으로 커다란 노란 나비가 날고 있다. 나비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삶과 진정한 혁명에 대한, 그러나 무엇보다도 희망에 대한 이야기, 어른과 그 밖의 모든 이를 (글을 읽을 줄 아는 애벌레들을 포함하여) 위한 이야기."

이 문구가 어린 나의 마음을 움직였던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나이에도 희망이란, 책 속에나 있는 간지러운 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오로지 꿈이라든가 희망을 논하는 스토리텔링은 좋아하지 않는다. 비현실적이고 진부하다. 이 책은 다행히 애벌레의 나비가 되고 싶은 희망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한 번도 날아다니는 존재를 본 적 없기 때문에 그런 꿈은 꿀 수조차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한 거라곤 먹고, 자라고, 또 먹고, 더 크게 자라는 것이 전부다. 어떤 이는 평생 그렇게 살다가 가기도 한다. “인생 뭐 있어?” 하면서 먹고 자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는 양 평생을 산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인 줄무늬 애벌레는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

"그저 먹고 자라나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거야."(p.4) 그것은 줄무늬 애벌레가 한 최초의 '생각' 이었다. 애벌레라서 쉬운 말로 했고 같은 생각을 앙드레 지드는 좀 더 철학적으로 표현했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그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왜 내가 살고 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애벌레들이 기를 쓰고 올라가는 커다란 기둥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 기둥의 실체는 애벌레 더미고, 아무도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올라간다. 저렇게들 서로 올라가려고 야단인 걸 보니 ‘틀림없이’ 굉장히 좋은 것이 있을 거라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걱정하지 않는 걸 보니 ‘틀림없이’ 좋은 곳일 거라고 무턱대고 확신할 뿐이다. 오르고 싶은 곳이 있다는 것은,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은 꿈이 있다는 것이다. 꿈이 있는 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과연 안심해도 되는가?

꿈을 이루기 위해서 줄무늬 애벌레도 다른 애벌레들처럼 자신의 진로에 방해되는 애벌레들을 가차 없이 짓밟고 올라간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을 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이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렇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은 단지 다른 애벌레들이 올라오고 싶어 하는 곳일 뿐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서있는 정상에 대한 비밀을 감춘다. 그래야 대단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힘을 다해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어떻게 해도 길을 내주지 않는 정상의 소수 애벌레 때문에 아래쪽 대다수 애벌레는 절망한다. 그리그 그 순간, 줄무늬 애벌레는 발견한다. 정상의 애벌레들 보다 더 높이 올라 정상을 내려다보는 그것을….

안간힘을 쓰며 기어오르지 않아도 높이 오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비행(飛行)이다. 그런데도 대다수 애벌레가 실체 없는 애벌레 더미를 기어오르는 방법을 택하는 이유는 자기 안에 나비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몰라서다.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믿을 수도 없다. 아니, 기어오르는 일에 너무 바빠서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거나, 알더라도 스스로 고치를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무한처럼 느껴질 고독의 시간을 견딜 용기도, 인내도 없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 가장 편한 방법, 남들 하는 대로 따라한다.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러나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남의 뒤통수만 보고 쫓아가다가는 줄줄이 낭떠러지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수가 있다. 노랑 애벌레의 꿈은 줄무늬 애벌레와 달리 정상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나비가 되는 것이었다. 그 꿈이 간절해서 지금까지 익숙했던 애벌레의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고치를 만들어 암흑 속에 갇히는 고통을 택했다. 그 끝에 이룬 꿈은 줄무늬 애벌레를 같은 꿈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꿈은 단지 그들의 꿈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의 제목이 <애벌레들에게 희망을>이 아니라 <꽃들에게 희망을>인 것은 나비가 꽃들에게 미래를 건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리라. 나비가 없으면 세상에는 꽃이 없을 테니. 덧붙여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해석에 따르면 꽃은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정상에 틀림없이 대단한 게 있을 거라며 스스로를 세뇌하고 노예 되기를 자처하지 않아도 된다. 기를 쓰면서 실체 없는 무덤 위를 기어오르지 않아도 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상을 동경하며 허기져 하지 않아도 된다. 날면 된다. 기어오르지 않고 날아오르면 그 정상을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다.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는 남의 꿈이 아닌 나의 꿈을 꿀 때 가능하다. 자기 안에 나비가 있는지도 모르고,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도 모르고, 평생을 애벌레로만 살다 죽는 것은 너무 억울하고 슬프다.

남의 꿈이 아닌 나의 꿈을 꾸기, 이것 하나를 평생의 꿈으로 품어도 좋으리라. 그러려면 적어도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꿈이 네, 희망이네, 아름다움이네 하고 속살거리는 것들에 속지 않고 날아오를 수 있을 테니. 스스로 고치를 만들고 기꺼이 암흑 속에 갇혀 지내는 시간은 그래서 필요하다.

※ 본 연재는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유선경/ 샘터/ 2016년)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그저 먹고 자라나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거야]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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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유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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