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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un 07. 2017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사랑은 진부한 소재 아냐..."

저자 히라노 게이치로 인터뷰


“이 세계에는 정말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복잡한 많은 일들 속에서 독자들이 잠시라도 아름다운 세계에 빠져서 현실을 잊는 체험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썼습니다.”


아련하고, 먹먹하고, 충만하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신작 <마티네의 끝에서>의 끝 맛이 그랬다. 오랜 기간 숙성되어 여러 겹의 향을 내는 와인을 맛본 기분이랄까. 50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은 천재 기타연주자 마키노 사토시와 이라크 분쟁지역을 취재하는 기자 유미네 요코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풋풋하고 물불 가리지 않는 10대, 20대의 사랑이 아닌 각자의 세계가 있고 책임져야 할 것이 많은 성숙한 이들의 사랑이다. 현실 속에서 최대의 낭만을 이끌어낸 소설이다.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 차 방한한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를 지난 5월 23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작가는 교토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 <일식>을 집필, ‘미시마 유키오의 재래라 말할 수 있는 신동’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1998년 데뷔했다. 1999년에는 일본 순문학계의 최고 문학상으로 손꼽히는 아쿠타가와 상을 최연소 수상했다. 이를 계기로 ‘천재 작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자신의 작품, 문학이라는 장, ‘현대’라는 세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자신의 세계관을 보여줬다.


21세기 현대의 천재 작가가 그린 사랑 이야기, 그가 가진 세계에 대한 인식은 어떤 것일까? 소설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작가의 생각이 궁금했다.





“작가는 지금의 세계를 독자들과 공유하는 사람”


“연애와 관련해서 뭔가를 쓸 때 사랑 자체가 진부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그려내는 형태 자체가 진부한 것이 문제예요.“


오래 전부터 사랑에 관한 소설을 쓰려는 생각을 가져왔다는 히라노 게이치로. ‘탐미’에 천착한 1기, 단편작품에 집중한 2기, ‘분인주의’에 천착한 3기에 이어 이번 신작은 4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마티네의 끝에서>는 전작 <형태뿐인 사랑>에 이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두 번째 연애소설이기도 하다. 가까운 지인의 사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그는 이번 소설이 작가 인생에서 굉장히 어려운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좋아해도 연인 관계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는 많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문학작품에서도 이런 소재가 많이 다뤄지고요. 모두가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것을 저속하지 않게, 잘 그려내기는 더욱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주제를 쓸 때는 아무래도 조금 바보스러워 보인다고 할까요?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지지 않거든요. 실제로 저에게 있어서 굉장히 어려운 도전이었습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얘기지만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쓴다면 아주 큰 얘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퀄리티 있는 글로 써보고 싶었어요. 작가로서는 도전하는 맛이 있었습니다.”


<마티네의 끝에서>는 ‘어른들을 위한 연애소설’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사랑은 어른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성숙한 어른들의 사랑을 본격적으로 다룬 소설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작가는 이번 신작은 성숙한 어른들이 겪는 사랑의 상황과 감정을 여러 층위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 10대 때는 모든 것을 다 내던지고 사랑만을 위해서 달리는 연애를 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어른이 된 후에, 가진 일도 있고 가정도 있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싹트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생에서 연애 외에 중요한 것들 안에서 벌어지는 연애. 그것이야말로 어른들의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열독가로도 잘 알려진 히라노 게이치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연애 소설을 꼽아 달라는 질문에 히라노 게이치로는 한국 소설가 김연수의 ‘달로 간 코미디언’을 거론했다.


“김연수 작가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단편집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이 책에 실린 ‘달로 간 코미디언’이란 작품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나 아빠와 딸의 사랑을 그리면서 사회 배경이 그 안에 잘 스며들어 있습니다.”


<마티네의 끝에서>는 2015년 3월부터 2016년 1월까지 약 1년간 일본의 일간지 ‘마이니치 신문’에 연재하며 발표한 작품이다. 두 주인공의 사랑이 이뤄질지에 대해 일본 독자들은 높은 관심을 보였다.


“신문 연재를 하고 있을 때 굉장히 재미있는 체험을 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독자들은 마키노와 요코, 두 주인공이 꼭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 드문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한 친구가 어떤 이성을 좋아해서 사귈지를 고민할 때 옆에서 지켜보며 꼭 사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거든요. ‘그들이 꼭 연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독자들이 느끼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픽션의 재미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는 고정된 것 아냐…가능성 줄이지 말길”


“인간은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뿐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과거를 바꾸고 있습니다. 바꿀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바뀌어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죠. 과거는 그만큼 섬세하고 감지하기 쉬운 것이 아닌가요?”
<마티네의 끝에서> p.36


소설 속에서 남자 주인공 마키노는 유코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인간은 과거의 산물이며 오직 미래만이 바꿀 수 있는 것이라는 게 통념이라면, 작가는 이것을 뒤집는다.


“인간은 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 안에서 본인이 뭔가를 규정하려 하기 쉬운데요. 예를 들면 어릴 때 내가 힘든 일을 당했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내가 이렇다는 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인과관계로 묶어서 본인의 가능성을 줄여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과거는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때도 있고, 의외의 사실을 알게 돼서 지금까지 알아온 것과 다른 과거로 바뀔 수도 있고요. 이 생각이 좋게 발현되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나쁜 쪽으로 발현되면 역사적 사실을 덮고 왜곡하려 할 수도 있겠죠. 베토벤의 푸가를 듣다가 이 생각이 났어요. 클래식 음악은 메인 테마가 있고 전개가 되면서 소나타나 푸가로 변주가 되죠. 이번 소설도 음악이 변주되는 것을 힌트 삼아 썼습니다.”


<마티네의 끝에서>는 사랑 이야기이긴 하지만,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이라크 사태, 리먼 브러더스 경제 위기, 3.11 동일본 대지진 등 21세기에 일어난 구체적인 현안에 의해 영향을 받고, 이에 따라 사랑의 운명도 뒤바뀐다.


“어제도 맨체스터에서 테러가 있었다고 하던데요. 작가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살아가는 세계를 독자들과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가 국제화되면서 개인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예를 들면 미국 월스트리트에 사는 사람들과 이라크에 사는 사람들이 직접적 관계는 없을지라도 여러 가지 형태로 구체화 되면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애매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저널리스트를 등장시켜서 지금 현재 세계를 구체적으로 그리면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굉장히 사적인 사랑에 대해서도 아름답게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현실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문학의 힘”


히라노 게이치로는 음악 마니아로도 유명하다. 특히 쇼팽을 향한 그의 열정은 각별하다. 19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예술가들의 삶과 고뇌를 그린 <장송>에서는 쇼팽을 직접 등장시키기도 했다. 최근에는 ‘쇼팽 마니아’적인 면모를 십분 발휘해 <쇼팽을 즐기다>라는 쇼팽 안내서까지 펴냈다. 쇼팽의 체취라는 아주 원초적인 영역에서부터 시작해 손의 모양, 수입원, 조르주 상드와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쇼팽의 생애 전체를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조망했다. 도대체 19세기 음악가 쇼팽의 어떤 점이 21세기의 소설가를 이렇게 매혹시킨 것일까?


“저는 쇼팽뿐 아니라 음악을 좋아합니다. 클래식뿐 아니라 락도 좋아하고, 재즈도 좋아해요. 음악을 듣다 보면 처음엔 좋았지만, 나중엔 질리는 곡들도 있거든요. 쇼팽은 10대 때부터 들었는데도 전혀 질리지 않고,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 중 한 명입니다. 그리고 쇼팽이란 사람의 인생, 성격이나 개인사에 굉장히 흥미가 있어요. 쇼팽의 곡 중 ‘뱃노래’, ‘발라드 4번’을 권하고 싶습니다. ‘녹턴 작품 27-2’는 사람들에게 제가 죽고 난 뒤 장례식 때 틀어달라고 말하곤 하는 곡이기도 합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높은 실업률로 고민하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그가 발명한 ‘분인(dividual)’의 개념이 유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분인’이란 고정된 인격을 가진 ‘개인(individual)’에 대비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복수로서의 나를 뜻한다.


“예전에는 나라는 정체성을 하나로 고정해서 이것을 실현해 나가는 직업을 갖는 모델을 취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취직을 해도 언제까지 그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또 취직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직업이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중요해요. 자신을 분인화 해서 일 할 때의 분인, 또 친구 관계에서의 분인과 같이 여러 가지 분인으로서 생활함으로써 인생에서 균형을 잡고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당장 일이 없다고 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고 친구 사이에서 분인에 가치를 두고 인생을 계속 살아가면 또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할 기회가 올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굉장히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싫은 현실을 견디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문학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출생 문제를 다룬 작품을 준비 중이다. 사람이 어떤 과정으로 출생하고, 그 과정이 인생을 어떻게 좌지우지하는지를 다룰 예정이다. ”저는 인간의 자유의사,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생각을 해오고 있습니다. 사실 태어나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생이 인생을 어떻게 구속하는지를 그릴 예정입니다.“




글 : 주혜진(북DB 기자)

사진 : 임준형(러브모멘트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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