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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un 19. 2017

봉태규"좋은 아버지 되는 법? 평상시 똑바로 사는 것"

저자 봉태규 인터뷰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자신도 몰랐던 또 다른 나를 보게 된다.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무기를 꺼내 위기를 극복한다. 삶의 벼랑 끝에서 누구는 미술을, 누구는 음악을, 누구는 여행을 만나 다시 살아갈 길을 찾는다. 배우 봉태규에게 그 무기는 글이었나 보다. 얼마 전 낸 에세이집 <개별적 자아>(안나푸르나/ 2017년)에서 ‘절망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큼 안 좋은 일들이 많았던 2009년 즈음, 문득 글이 쓰고 싶었다’면서 글을 쓰게 된 계기를 밝혔다. 그때부터 들어오던 시나리오나 대본을 소설처럼 읽던 데서 벗어나 진짜 소설과 에세이를 읽고, 못 다루는 컴퓨터 자판 대신 핸드폰과 아이패드를 원고지 삼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그의 곁엔 한 권의 책으로 묶을 만큼 많은 글들이 쌓였다. 그 속에 표현된 인간 봉태규는 어떤 자아를 지녔을까. 6월 7일 서울 한남동 북파크에서 아직은 낯선, 작가 봉태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들이 내 얘기 많이 하니 정작 나는 나를 모르겠더라”
 
Q 작가 소개가 참 심플하다. ‘봉태규 생각보다 글을 꽤 잘 쓰는 사람’이라고만 썼다.
 
사진도 얼굴이 잘 안 나타난 사진을 실었다. 내 글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데 내가 가진 직업, 지금까지 내 모습이 불리할 거라고 생각해서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우리나라는 재미있는 역할을 하면 그 사람이 진지하다고 생각을 못한다. 그런데 글을 쓰는 건 사람들이 굉장히 진지한 작업으로 인식하고 있어서 읽히기도 전에 선택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예인이 썼다고 알리고 싶지도 않아서 인터뷰도 별로 안 했다. 또 내 생각엔 내가 잘 쓰는 사람 같다. <개별적 자아>는 우리나라에서 나온 에세이 중 꽤 재미있는 에세이라고 생각한다.
 
Q 제목이 <개별적 자아>인데 책 속 봉태규는 어떤 자아를 지닌 사람인가.
 
연예인으로서 개인적인 얘기를 할 기회가 거의 없다. 인스타그램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개인적인 얘기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모습이다. 마음 속 얘기나 평소 내가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지는 표현하기 굉장히 어렵다. 인터뷰도 직업적인 모습에 국한돼 있고…. 글을 쓰면서는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책을 읽어보면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냉소적인 것과 사람이든 사물이든 좀 뚫어지게 보는 것 정도만 느껴진다.
 
Q 정말 그렇다. 책을 읽으면서 관찰력이 뛰어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자신의 입술부터 마음의 크기까지 재보는 첫 에세이부터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은 남은 봐도 자기 자신을 잘 돌아보지는 않는데….
 
워낙 다수에게 노출돼 있잖은가. 직업적으로 노출돼 있다 보니 내가 아닌 다수가 좋다는 것은 드러내려고 하고 안 좋다는 건 감추려고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게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얘기를 많이 하니까 정작 나를 모르겠더라.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심지어는 발 사이즈까지도. 그래서 배우로서 내가 나를 잘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제일 먼저 할 일이 장점보다 내가 가진 단점 혹은 약점에 대해 인정하는 거였다. 그래서 그런 과정을 거쳤다. 또, 사람들이 댓글 등에 하도 제 외모에 대해 얘기를 하니까 더 역설적으로 얘기한 부분도 있다. ‘이제 속이 시원해요?’라고.
 
Q 책에 실린 글 중 ‘먹고 또 먹고’에서 악플에 대해 솔직한 심정을 내비쳤다. 직업인으로서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쉽지는 않았는데 악플을 보면 정말 답답할 때가 있다. 제 외모가 꼴 보기 싫다면 그것까지도 저는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내 외모는 내가 선택한 게 아니잖은가. 그건 나를 욕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 부모님도 욕할 수 없다. 그 윗세대 윗세대 윗세대로 끝없이 올라가야 하는 문제이니까. 정말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슬픔은 나중에 뜬금없이 찾아왔다”
 
‘음… 이렇게 세면대의 고여 있는 물과 같은 마음의 크기를 가진 나는, 누군가 ‘바다와 같다’는 표현으로 한 사람이 가진 마음의 크기를 얘기할 때면 멍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11쪽)’고 고백하고, ’그래도 ‘막 생겼다’는 표현은 평가조차 받지 못한 거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기는 하는군요.(60쪽)‘라고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봉태규는 ’한 그루의 나무에게도 이렇게 착각의 오류가 심한데, 인간에게는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관계에도 환절기라는 게 있지 않을까.(104쪽)‘처럼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나무를 보면서 인간사를 떠올릴 줄 안다.
 
Q ‘나무 씨’에서 사람 사이 환절기를 언급했는데 실제로 인간 관계에서 환절기를 느낄 때가 있나.
 
그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무시한다. 환절기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무시하거나 모른척한다고 해서 해결되거나 안 느껴지는 건 아니다. 계절 사이 붕 떠 있는 날씨는 너무 좋아하지만 관계에 있어서 사이가 붕 뜨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Q 어미가 독특하다. ‘~했다’로 나가다가 ‘~했습니다’ ‘~하는군요’처럼 나오기도 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모르니까 그렇게 썼던 것 같다. 그리고 한국어의 존댓말이 참 예쁘다. 누군가를 존대해서가 아니라 글을 쓸 때마다 느끼는데 ‘~다’로 끝내기보다 ‘~했습니다’ 했을 때 부드럽게 넘어가는 게 있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 에세이들을 읽고 느낀 건데 너무 제3자의 느낌이 강하다. 작가의 얘기고 분명 그가 하는 얘기인데 너무 딱딱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중간에 존대 표현이 들어가니까 조금 더 내가 직접 이야기하는 느낌이 들었다. 에세이에는 적합한 글쓰기 방법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Q 책에서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지만 에세이는 글쓴이의 거죽부터 깊게는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 있어서 내겐 읽는 재미가 훨씬 크다’고도 했는데 봉 작가가 생각하는 에세이의 매력은 무엇인가.
 
소설을 읽다 보면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어쨌든 소설이지 않나. 리얼해 보이는 거지 리얼은 아니라는 얘기다. 에세이는 어느 정도 각색이 들어갈지라도 진짜 얘기를 하는 것이지 않은가. 영상에서도 물론 영화나 드라마가 더 재미있지만 다큐멘터리가 주는 진정성을 쫓아갈 수는 없다. 에세이가 영상으로 치면 다큐멘터리 같다. 글쓴이가 진짜 자기 얘기를 하는 진정성, 그게 에세이의 가장 큰 매력이지 않나 싶다.
 
Q 그래서인지 아버님이 돌아가신 날을 다룬 ‘그날… 그리고 그날’은 굉장히 건조하게 썼음에도 슬픔으로 다가왔다. 어느 한 지점을 넘어서면서 쓴 글인지?
 
월간지에 기고를 할 때인데 마감이 다가오는데 글이 너무 안 써졌다. 아버지 기일 즈음이었을 거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현실적이지 않아서 아주 많이 슬프지도 않았다. 그 현실이 아주 나중에 나중에 왔다. 시간이 어긋났다가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시간하고 만난 거다. 그 즈음에 썼다. 그래서 더 격앙되지 않고 차분하게 옮길 수 있었다.
 
Q 그래도 쓰면서 울지는 않았나.
 
그 당시에는 안 오고 나중에 뜬금없이 온다. 아버지가 대머리이셨는데 대머리인 할아버지를 볼 때. 뚱뚱하지 않은 대머리인 할아버지들의 공통된 모습이 있다. 끝에만 머리가 남아 있고 귀 뒤에 주름이 가 있는 모습. 그런 뒷모습을 볼 때(뒷말을 잊지 않았다.)
 
Q 예비 아빠일 때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고민을 다룬 글도 책에 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지금도 그 고민을 하고 있는지.
 

요즘 더 한다. 진짜 어려운 문제다.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데서부터 시작인 것 같다.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지’는 내가 원하는 거지 내 아이가 원하는 건 아니잖은가. (내가 원하는 걸 고집하면) 거기서부터 무리가 된다.
 
무엇보다도 평상시에 똑바로 사는 게 중요한 것 같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 남자로 살아가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쉽지 않은 듯싶다. 술자리에서 성희롱이 서슴없이 나오고 여러 잘못들이 관행이라고 묵인되는 문화이고, 나도 그렇게 자랐다. 그게 내 아들이 자랄 때조차도 남아있기 쉽다. 내가 아버지로서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모습은 적어도 그게 관행이 아니고 잘못됐다는 걸 가르쳐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좋은 30대 남자가 아닌 것 같다. 아직 배우고 있는 중이다. 이미 자라면서 몸에 밴 게 있기 때문에 실생활에서 굉장히 조심하려고 한다.
 


 
“연기는 연기가 되지만 글은 가짜가 안 돼”
 
Q 힘들 때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글을 쓰면서 어려움들이 극복됐나?
 
글을 써서 극복했다기 보다는 글을 쓰는 동안 시간이 계속 가지 않았나. 그동안 내가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게 되더라. 글을 쓰던 그러다가 아내를 만나게 되던 시간에 놓여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겨내게 됐다. 지금 멀쩡하게 살아있지 않은가. 시간에 그냥 나를 맡기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오다 보니 나도 모르게 해결됐다. 당시에 그걸 알았다면 지금 여기 없고 강연을 하고 다녔을 텐데…. 물론 또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나는 거기에 매몰돼서 또 모를 거다.
 
힘들 때 글을 쓰는 게 환기가 되긴 한다. 내가 안 하던 걸 하면 내 몸이 막 당황하는 게 느껴진다. ‘어, 뭐지?’ 스스로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후루룩 넘어가는 게 있다. 내가 움직이는 대로 몸이 막 따라오는 거다.
 
Q 마지막으로 글쓰기와 연기가 서로 닮은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나에 대해 진짜 많이 고민해봐야 된다는 거? 예전에 연기할 때는 그렇게 생각 못했는데 나를 굉장히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나를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기는 목소리는 물론 감정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로 해야 한다. 그런데 글이 그렇더라. 내 모든 걸 써야 글로 옮겨지더라.
 
다른 면이 있다면 연기는 연기가 가능하다. 배우로서 내 자신을 잘 알고 진실해야 하지만 연기는 기술적으로 연기를 해야 될 때가 있다. 그런데 글은 가짜가 안 된다. 쓰다가 그럴 듯하게 바꿔보려고 하면 진짜 거짓말처럼 막히더라.
 
 
‘순전히 허무맹랑하고 황당한 벌거숭이의 상상’(p.15)이 가능하며, ‘그때그때 상대적 약자에게 마음이 쏠리는’(55쪽) ‘겨우 남편’(121쪽)이자 아들의 큰 눈망울에서 무한한 우주를 발견하는 아버지, 외모에 대한 악플에 소심한 항변을 쓰면서도 열심히 팩을 하는 천생 배우이자 ‘설사 다음번에는 독자와 만날 수 없다 하여도 괜찮습니다’(p.171)라고 하지만 ‘그저 글을 쓰고 싶을 뿐’인 작가. <개별적 자아> 속 봉태규는 참 많은 자아를 품고 있었다. 모든 우리가 그러하듯.
 


글 : 신정임(북DB 객원기자)
사진 : 기준서(스튜디오 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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