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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Feb 18. 2016

'영미 번역 대가' 공경희 "번역은 혼자 놀기의 진수"



번역가 공경희는 인터뷰 전날 대만 여행에서 돌아왔다고 말했다. 사진 촬영을 하는 줄 모르고 왔다며 여독으로 인한 초췌함을 걱정하면서도, 이내 체념한 듯 수줍게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는 모습은 문학소녀를 연상시켰다. 지적이고 날카로울 것 같다는, 번역가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근거 없는 선입견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번역 작업이 주는 고독함을 달래기 위해 종종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어쩌면 독서란 책으로 떠나는 여행. 첫 대만 여행에 대한 후일담으로 시작된 인터뷰는 어느새 <나이팅게일>이라는 소설 속으로 날아갔다가 번역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당도했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게 되고, 전쟁에 휘말리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 <나이팅게일> 중에서


<시간의 모래밭> <호밀밭의 파수꾼>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메디슨카운티의 다리> <파이 이야기> <좀비-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봄에 나는 없었다> <우리는 사랑일까>의 공통점은? 다소 ‘답정너’스러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번역 공경희’다. 1987년 시드니 셀던의 <시간의 모래밭>을 시작으로 29년 동안 3백여 권이 넘는 책을 번역한, 그야말로 영미 번역의 대가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이름이다.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의 영화를 보기 위해 기꺼이 극장에 돈을 지불하듯, ‘번역 공경희’라는 사실은 영미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하나의 선택 기준이 되기도 한다.

공경희가 번역한 신작, 크리스틴 한나의 소설 <나이팅게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를 배경으로 상반된 성격의 두 자매가 각자의 방식으로 전쟁을 겪어내는 이야기다.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지만, “사랑에 빠지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게 되고, 전쟁에 휘말리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는 소설의 첫 문장처럼 전쟁의 참상과 이로 인해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날카롭게 천착한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처음 번역 의뢰가 왔을 땐 단순히 전쟁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미국이나 유럽의 교과 과정은 한 학기에 소설 한 권을 읽고 끝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을 읽으니 그 이유를 비로소 알겠어요. 한 권의 소설 안에 역사와 철학과 정치와 윤리가 다 들어 있으니 따로따로 배울 필요가 없는 거예요. <나이팅게일>은 독자의 관점에 따라 역사소설, 가족소설, 연애소설, 성장소설로도 읽히는 다채로운 매력이 있어요. 번역자의 위치를 떠나 소설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책 읽는 즐거움을 흠뻑 느낀 작품이었습니다.”

공경희의 말처럼 <나이팅게일>은 가족 간의 사랑, 남녀의 사랑, 나치의 만행, 인류애 등의 다양한 이야기가 잘 버무려져 있다. 아마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쉽고 재미있어 누구나 큰 어려움 없이 소설 읽는 재미를 흠뻑 느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반면 촘촘한 묘사나 지적인 문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작품성에 대한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다.

“이우환의 그림으로 비유해볼까요? 베네치아 비엔날레, 카셀 도쿠멘타 등 주요 국제전에 참여했고 파리 주드폼 미술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세계적인 현대미술가죠. 그런데 그림은 어떤가요? 파란색 단순한 선 몇 개를 그어놓은 것 같잖아요.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저런 그림은 나도 그리겠다’고 말하죠. 하지만 아니잖아요. 단순함 속에 사물과 인간에 대한 철학이 다 담겨 있죠. 소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촘촘하고 지적인 작품도 나름의 매력이 있고 배우는 것도 있지만, 전쟁의 참상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토록 누구나 다 아는 문장으로 풀어내는 것은 더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한 권 한 권 첫 작품처럼 새로워... 번역은 할수록 어려운 작업"

공경희는 어떻게 번역가가 됐느냐는 질문에 두 가지 버전의 대답을 준비해놓고 선택하라고 말하곤 한다. 우연과 운명.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시드니 셀던의 <시간의 모래밭>을 번역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 책에 대한 반응이 정말 뜨거웠어요. 번역 작업의 재미와 넘치는 호응에 취해서 계속 번역 일을 맡다 보니 어느새 30년이 흘렀네요. 지금까지 단 하루도 번역 계약이 끊긴 적이 없고, 그 사이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우연이 운명이 됐다 해도 과언은 아니죠? 저는 참 운이 좋았어요. 1987년 저작권법이 발효된 시점에 번역 작업을 시작해서 이전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또 소설, 비소설, 아동물까지 다양한 장르의 좋은 책들을 만나면서 베스트셀러 출간에도 여러 번 참여해 많은 독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지만, 손가락이 300개가 넘으면 좀 무감각할 법도 하다. 번역이 기능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서 어떤 이는 ‘이젠 눈 감고도 하겠다’고 우스갯소리를 건네기도 한다. 

“한 권 한 권이 마치 첫 작품처럼 새롭고 일깨워주는 게 있다고 하면 믿으실까요? 번역은 하면 할수록 어려운 작업이에요.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과 소설에 대한 이해가 자연스럽게 깊어지다 보니까 아주 작은 부분들도 쉽게 지나칠 수가 없어요. 예전에 멋모르고 할 때보다 오히려 작업 시간이 더 걸려요.”

공경희는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악인에게도 ‘사정’이 있다는 것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한 어떤 이유, 운명, 까닭, 사연… 한마디로 ‘그 남자의 사정, 그 여자의 사정’에 귀 기울이게 됐다. 번역가는 외국어를 잘하는 것은 기본이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잘 읽어서 생명력과 존재 이유를 독자들이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오만하고 철없던 시절, 세심하게 보살피지 못한 인물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많이 갖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번역해보고 싶은 작품은 <메디슨카운티의 다리>. 요즘 독자들에겐 생소할지 모르지만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는 1993년 국내에 처음으로 출간된 뒤 100만 부가 훨씬 넘게 팔리며 10여 년 동안 사랑받아온 1990년대 로맨스 소설의 고전이다.

“그 책을 번역할 때 만 28세였어요. 스테레오 타입의 모범생에 결혼한 지도 얼마 안 된 신혼이었죠. 결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건 부도덕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마흔 이후의 여자는 여자도 아니라는 교만한 생각을 품고 있었고요. 번역자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어땠겠어요? 초반에 뿌옇게 먼지 낀 메디슨카운티 다리 풍경이 세세하게 묘사되는데, 저는 단지 하나의 배경 묘사라고만 생각했지 그것이 꿈 없이 하루하루 시골에서 살아가는 여자의 내면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어요.

부엌에서 촛불을 켜놓고 두 사람이 춤을 추던 장면도 떠오르네요. 촛불은 아무 때나 늘 켜놓고 있는 것은 아니고 금방 꺼지는 속성이 있죠. 부엌은 여태껏 그녀가 살아왔고 또 벗어날 수도 없는 삶 자체이고, 시간이 지나면 꺼지는 촛불은 그들의 사랑이 지속될 수 없음을 말해주죠. 그런 것들이 다 복선이고 연결돼 있는데 저는 그걸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아마 지금 다시 번역한다면 기본적인 텍스트야 변하지 않겠지만, 많은 부분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요.”



"언어 장벽보다 제한된 삶이 한계... 격차 줄이려 ’다중이’ 된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번역을 잘해도 원작을 뛰어넘지 못하며, 더 혹평을 하자면 엉터리 번역은 작품을 망칠 수도 있다는 뜻일 것이다. 번역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시절, 번역서를 읽으며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몰라 한숨을 푹푹 쉬던 경험, 누구나 다 갖고 있을 것이다. 

“제 스승이 저한테도 그런 말을 해서 한동안 미워했던 적이 있어요.(웃음) 그런데 지금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두려운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 신중해지고 책임감을 느낍니다.”

공경희는 번역의 최종 언어는 도착어, 즉 한글이므로 우리말을 이해하고 잘 쓰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말로 꾸준히 글 쓰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창작활동은 하지 않으므로 번역하는 작품 내에서 매일 꾸준히 글을 쓰고, 다양한 책을 읽고, 다양한 세계로 여행을 떠나며, 다양한 매체를 접하려고 노력한다.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봐요. 요즘의 언어가 나오잖아요. 3대가 등장하는 김수현 드라마부터 신세대 작가들 작품까지 골고루 보면서 유심히 관찰하죠. 남자의 언어는 제가 잘 모르니까 영화를 많이 보고요. 언제부터인가 일을 할 때 언어의 장벽보다 제한된 삶이 더 큰 한계로 다가와요. 세상은 너무 광활하고 변화하는 속도는 전광석화인데 저는 작은 방에 혼자 앉아 작업을 한단 말이죠.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해 혼자 이 사람도 돼보고 저 사람도 돼보고, 그야말로 ‘다중이’가 따로 없죠. 번역은 혼자 놀기의 진수예요.”(웃음)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독자들도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니다. 독자는 젊어지고 그는 자꾸 나이가 들어간다. 그래서 언어의 뉘앙스를 고르는 것은 작품을 할 때마다 큰 고민을 안겨준다. 문화가 다른 세상에서 창작된 작품을 우리말로 가져올 때 불가피하게 거쳐야 하는 해석과 이해와 존중도 어려운 문제지만, SNS 등으로 인해 우리말의 어휘가 갈수록 한정되는 상황에서 아름다운 우리말과 트렌드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도 큰 숙제다. 

“예를 들어 ‘슬프다’는 표현에는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자식이 죽은 슬픔은 그냥 슬프다는 말로는 부족하죠. 그래서 제가 ‘애끊다’라는 표현을 쓰면 요즘 독자에게는 낡은 느낌을 주는 거예요. 꼭 쓰고 싶은 우리말이 있어도 못 쓸 때는 ‘다음에 써야지’ 하고 아껴놓기도 해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만났을 때는 원작자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듯도 하다. 공경희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각이 없어졌다고.

“문학 작품이 출간되면 작가의 품에서 훨훨 떠나 독자의 몫이 되듯이, 저에게 온 책 또한 이미 원작자의 손을 떠났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번역의 역할이고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이런 말도 있듯이 원작자가 놓친 부분이라든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도 번역자가 더 깊이 생각해서 표현할 수도 있거든요. 고정되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것, 이런 게 문학작품을 비롯한 모든 창작물의 매력이 아닐까요?”

이렇게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는 별개로 정작 그 자신은 ‘번역자는 최대한 안 보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결국 문학 작품은 작가와 독자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도연과 공유가 ‘남과 여’라는 영화에 출연하잖아요. 그런데 전도연이 자꾸 아이를 데리고 나타나면 그 사랑 이야기에 몰입이 되겠어요? 독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작품 안에 자꾸 번역자 공경희가 왔다 갔다 하면 분명 방해가 될 거예요. 번역은 그래서 참 미묘해요. 이런 지점이 어려우면서도 재미있어서 지루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친구도 별로 없고 별다른 취미도 없는데 그래도 심심하지 않으니까 참 다행이죠.”


컴퓨터 옆 작은 모형 의자... "항상 독자가 앉아 있다고 생각"


사람들은 원작과의 괴리가 적고 감성이 풍부해 공경희의 번역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왜 사람들이 본인의 번역을 좋아하는 것 같으냐고 묻자 그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운이 좋았다고 하면 너무 책임감 없겠죠?” 하더니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는 ‘작은 의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리 집에 조그만 나무로 만들어진 모형 의자가 있어요. 고흐의 그림 ‘빈센트의 의자’랑 똑같이 생겼어요. 컴퓨터 옆에 늘 놓아두고 일하고, 여행 갈 때도 가져갑니다. 그 의자에 항상 독자가 앉아 있다고 생각해요. 매일 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어느덧 독백이나 일기처럼 나만 아는 글이 돼버리거든요. 번역을 시작했을 때부터 받았던 칭찬이랄까 그런 게 있다면, 번역물인데도 읽기가 좋다는 거였어요.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볼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하려고 했던 노력을 독자들이 알아봐준다면 감사하죠.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독자와 저자를 잇는 다리가 되고 싶어요.”

공경희는 오랫동안 작업을 해오며 이제야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이해가 생기고 소설을 보는 눈이 트이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문학이라는 장르에 더 애정이 가고, 좋은 작품을 만나서 가능한 한 오랫동안 현장에서 작업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을 가장 좋아하지만, 마지막에서는 청소년물이나 유아동물에 집중하고 싶어요. 아동물은 영어도 간단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신경 쓸 게 굉장히 많고 정말 숙련된 사람이 해야 해요. 왜냐하면 성인 독자층이 두터워지려면 어렸을 때부터 좋은 책으로 시작해야 하니까요.”


취재 : 이미회(북DB객원기자) 

사진 : 기준서(스튜디오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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