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은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윤동주 시 ’길’의 일부
지리산의 밤을 겪은 뒤 윤동주의 시 ’길’을 절감했다. 밤이 그토록 고요하고, 하늘에 그렇게 별이 많다니. 아주 당연한 그것들이 새삼스러웠다. 인간으로 태어나 밤의 고요와 하늘의 별을 잃은 채 살았다. 지리산에서 몇 번의 밤을 보낸 뒤, 내가 잃어버린 걸 오랜만에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지리산에서 살다보니 자주 손님이 찾아온다. 도시에서 지친 지인들이 잠시 쉬러 온다. 이들 역시 자신들이 잃어버린 채 살아온 것들에게서 위로와 안식을 얻는다. 검은 밤의 고요와 별, 한낮의 지루함과 평온, 바람소리, 새 울음소리, 나무와 꽃… 돈 벌다 지친 삶은 돈 안 되는 것들을 사랑한다. 잠시라도 말이다.
지리산을 찾는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꼭 책을 한 권 이상씩 들고 온다는 점. 하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들 그 책을 읽지 않는다는 점도.
열에 아홉은 책을 펴지 않고 술만 마시다 간다. 안타깝게도, 사람은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 숙명이란 그런 것이다. 도시에서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산에서도 안 읽는다. 도시에서 술을 좋아하던 사람은 산에 오면 더 많이 마신다. 공기가 좋아서 안 취한다는 비과학적 근거를 대면서 말이다.
사실 지리산은 책 읽기에 그렇게 좋은 곳이 아니다. 특히 쉬러 오는 사람에겐 말이다. 책과 함께하는 지리산의 하룻밤은 분명 좋은 휴식이지만,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부족한 잠을 자면서 별도 봐야 하고, 조용하게 산마을 산책하다가 저녁이면 고기도 구워 먹어야 하는데, 언제 책장을 넘기겠는가. 낯선 곳에 오면 눈은 새로운 것에 쏠리는 법이다.
그래도 책을 꼭 가져오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한 가지 팁을 주고 싶다. 두꺼운 책보다는 얇은 책, 인문사회과학보다는 문학, 소설보다는 시집을 권한다. 앞서 말한 대로, 책 펼칠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 지리산엔 책 말고도 볼 만한 것들이 꽤 있다. 특히 돈 버느라 지친 당신에겐 말이다.
시집은 들기 편하고, 읽기도 좋다. 좋은 시 하나는 지리산만 한 감동을 준다. 시 하나가 가슴에 박히면 그 감동의 기운은 섬진강보다 오래 흐른다. 시의 힘은 그런 것이다. 시인 고정희는 시집 <지리산의 봄>에 이런 시를 썼다.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는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 시 ‘천둥벌거숭이 노래 10’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일생을 버티게 한다니. 사실 고정희 시인만 그런 게 아니다. 인간의 삶은 대단한 꿈과 이상으로 지탱되지 않는다.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으로 “몇 번의 겨울을 버티”는 게 인간이다. 내 지인들이 ‘지리산에서의 2박 3일’로 서울에서의 3개월을 버티듯이 말이다.
요즘 지리산엔 치자꽃 향기 대신, 매화향기가 산과 들에 범람한다. 목련, 진달래, 벚꽃이 서서히 북진하고 있다. 꽃맞이 하러 많은 사람이 서울에서 남하한다. 꽃과 사람은 지리산 아랫마을에서 충돌하고 뒤섞인다. 내가 사는 전남 구례의 도로는 이 즈음이면 출퇴근 시간의 서울 강변북로처럼 막힌다. 시인 최영미는 이렇게 썼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 시 ’선운사에서’ 일부
폈는가 싶으면 지는 게 꽃이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사람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시 ’선운사에서’는 이렇게 끝난다.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꽃의 힘은, 시의 힘과 비슷하다. 짧지만 오래 간다. 금방 져도, 그 향기와 모양을 잊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람은 교통체증 마다 않고 먼 길을 달려온다. 곧 고창 선운사의 동백이 절정이다. 4월에 선운사를 찾으면 왜 최영미 시인이 저런 시를 썼는지 이해할 수 있다. 동백의 붉음, 잊는 데 한참 걸린다.
ps) 동백이 질 즈음엔 지리산 깊은 곳에 얼레지가 핀다. 김선우 시인이 쓴 ’얼레지’는 내가 읽은 가장 관능적인 시다. 몸이 뜨거워져서 차마 여기에 옮기지 못하겠다. 알아서 찾아 읽으시길. 한 구절은 이렇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꽃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시집 한 권씩 들고 꽃에게 달려가시길.
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