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동네 사람, 구례군민 모두가 그를 아는 듯했다. 너도 나도 그 남자에 대해서 말했다.
“OO마을로 이사 간다고? 그 동네에선 그 남자만 조심하면 돼.”
모두가 그를 경고한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 사는지는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다 그 남자에게 딱 걸렸다. 귀촌 초기, 아직 촌티(?)를 벗지 못한 도시것인 내가 산과 들에 감탄하며 아침 6시부터 동네 산책에 나선 날이었다. 동네 길목에서 그 남자가 나를 불렀다.
“어이, 들어와! 차 한잔 하고 가!”
마을 신입이 어떻게 원주민의 부름을 무시한단 말인가. 차 한 모금 마시고 산책해도 좋겠다 싶어 남자의 집에 들어갔다. 남자는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냈다. 그에게 차는 막걸리였다. 그에게 잡혀 오전 9시까지 막걸리를 마셨다. 아침부터 취한 나는 집으로 돌아와 쓰러졌다. 잠에서 깼을 땐 지리산 왕시루봉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 남자의 명성을 몸으로 깨달았다. 지리산 피아골 주민이 다 알고, 그 명성이 섬진강 물줄기처럼 퍼져 구례군민 모두가 아는 듯한 우리 동네 대표 ‘꼴통’. 그래도 이웃들은 다른 동네 사람에 비해 좋게 말하는 편이다.
“참 착하고 좋은 사람이야. 술을 마시면 꼴통이 돼서 그렇지.”
하지만 그가 1년 365일 중 360일 술을 마시고, 거의 대부분 취해 있다는 점. 게다가 내가 사는 집을 출입하려면 꼭 그의 집 앞을 지나쳐야 한다는 점. 그게 문제다. 그는 늘 웃으며 “어이, 차 한잔 하고 가!”를 외치지만, 나는 아침 차(?)를 진하게 마신 그날 이후 늘 “나중에…”라고 말끝을 흐리며 종종걸음 친다. 사실 동네 ‘꼴통 아저씨’를 향한 나의 감정은 복잡하다. 그가 불러주면 고마우면서도, 외면하고 지나칠 때면 미안하기도 하다.
24시간 편의점이 전국의 구멍가게를 밀어내기 전, 그러니까 ‘중고딩’이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정체 모를 허기를 달래는 풍경이 대세가 되기 전, 시골과 도시 변두리의 구멍가게 앞 평상에는 늘 김치 등 하찮은 안주에 술을 마시는 동네 아저씨들이 있었다.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다 어느새 목청 높여 드잡이 하며 싸우고, 그러다가 또 둘도 없는 친구처럼 동네방네 시끄럽게 떠들며 술을 마시는 ‘꼴통들’은 마을마다 꼭 있었다. 어디 꼴통뿐인가. 동네마다 한두 명씩 바보가 있었고,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이용해야만 움직일 수 있는 몸이 불편한 어른들도 있었다.
사실 사람 사는 세상의 인적 구성은 그게 정상이지 싶다. 가르침을 주는 어르신이 있으면 꼴통이 있는 법이고, 건강한 청년이 있으면 몸 아픈 노인이 있기 마련이며, 똑똑한 아이가 있으면 바보가 있는 게 자연스런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후자의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동네 꼴통이 조금만 떠들면 경찰에 신고하고, 몸 아픈 노인은 요양원에 수용(?)돼 있으며, 바보는 산 좋고 물 좋은 어느 시설(?)에 갇혀 있다. 그들이 잘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는 한 번쯤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잘난 사람들끼리 모여 살아서, 우린 과연 행복한가?”
“조용하고 깔끔한 카페에 앉아 언제든 세상 누구와도 접속할 수 있는 세상인데, 사는 건 왜 이렇게 고독하고 쓸쓸한가.”
사는 게 힘들 때면 사람은 종종 과거의 어떤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한데, 가만 보면 과거의 그 모습은 찬란하거나 예쁘지만은 않다.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가난하고 누추한 어떤 풍경에 위로를 받곤 한다. 바보처럼 교사를 때려치우고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가가 되더니, 또 멍청하게 당선이 희미한 녹색당 국회의원 후보로 총선에 출마한 이계삼은 <고르게 가난한 사회>에 이렇게 썼다.
인생을 그리 오래 산 것도 아닌데, 기억의 시침은 자주 유년기의 고향 마을로 향한다. (중략) 남포리. 밀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가곡동에서도 제일 못사는 마을로 손꼽히던 강변 마을.(중략) 가난한 동네가 늘 그러하듯 밤이면 취한 아저씨들의 주정과 쌈박질이 있었다. 민정당 일을 봐 주던 마을지도자가 있었고, 일거리 없는 동네 아저씨들이 날품팔이를 위해 새벽 자전거를 타고 읍내로 나가던 길목에 우리집이 있었다.
(중략) 그 유년 시절, 남포리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그 농민, 날품팔이 일꾼들에게서 무언가 일생토록 그리워할, ‘사람의 얼굴’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비천함 뒤에 감추어진 슬픔’을 ‘무지의 가면 속에 숨어 있는 눈물 젖은 얼굴’(톨스토이)을 말이다.
내가 우리 동네 꼴통 아저씨에게 종종 고마움을 느끼는 건, 내가 살았으나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그 고르게 가난했던 유년의 마을을, 그가 자주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이계삼의 <고르게 가난한 사회> 역시 그러하다. 추억 속의 ‘우리 동네 꼴통’을 떠올리게 하고, 이제는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알 길이 없는 동네 바보를 괜히 생각나게 해 코끝이 시리게도 한다.
총선이다. 여러 후보가 우리 동네를 개발하겠다고, 부자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 와중에 이계삼은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위해 출마했다고 한다. 누구를 지지하고, 어떤 이에게 표를 줄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다만, 우리는 분명히 더 부자가 됐는데 왜 자꾸 가난한 시절을 떠올리는지, 이웃집 꼴통이 조금만 떠들어도 경찰에 신고하는 안전과 안락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어쩌다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은 집에 돌아오지 못했는지,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한다.
말이 길었다. 꽃도 지는데, 오랜만에 꼴통 아저씨랑 막걸리나 한잔 해야겠다. 이 고독한 세상에서 “들어와! 차 한잔 하고 가!” 하며 불러주는 이웃이 있는 게 어디인가.
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