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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칼럼

세상은 그렇게 변한다

by 인터파크 북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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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에 누군가 현관문을 ‘쿵쿵’ 두드렸다. 놀라 나가보니 아랫집 중기댁 엄니다.

“투표하러 안 가? 갈 거면 나 좀 태우고 가. 병원도 들렀다 오게.”

잠이 덜 깬 상태여서 얼떨결에 “알았다”고 답했다. 방으로 들어와 시계를 보니, 세상에나 5시 30분이다. 더 자려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잠이 들 찰나, 이번엔 이장님이 마이크를 잡고 마을방송을 했다.

“아, 아. 마을 주민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오늘은 제20대 국회의원을 뽑는 날입니다….”

다시 시계를 봤다. 아, 놀라워라. 고작 30분이 지난, 6시다. 내겐 너무 이른 시간이지만, 산골마을 사람들에겐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이다. 새벽(?)에 나를 깨운 중기댁 엄니의 얼굴과 이장님의 목소리에 미안한 기색이 없는 건 당연하다. 약속대로 중기댁 엄니를 차에 태워 투표소로 향했다.

“엄니, OO당 알아요? 정당투표 거기 찍어줘요.”

“그게 뭐여?”

엄니는 내 꼬드김에 넘어오지 않았다. 흔들리지도 않았다. 하긴 내가 지지한 정당은 엄니에겐 ‘듣도 보도 못한 정당’이었다.

“엄니, 그럼 어디 찍을 건데요?”

“안 갈쳐줘! 비밀인데, 왜 물어봐!”

그러면서 엄니는 “우리는 찍는 데가 정해져 있다”고 말했다. 여기는 전남 구례. 비밀이어도 쉽게 예상이 된다. 이 지역을 지배한 색깔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이 빗나갔다. 이 동네만 그런 게 아니다. 이 동네, 저 동네 곳곳에서 색깔이 변했다. 내가 지지하든 안 하든, 지는 싸움에 몸을 던진 사람들 때문이다. 고정관념, 편견에 금이 간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선거의 여왕’이 지다니. 세상 일, 모르겠다.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선거 직전까지 읽었던 책 <앵무새 죽이기>에서 변호사 아버지는 어린 딸 스카웃에게 이런 말을 한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앵무새 죽이기>는 대공황 시기 미국 남부의 백인 중심 보수적인 마을에서 벌어진 인종차별 사건과 이를 극복하려 기꺼이 ‘지는 싸움’을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린 소녀 스카웃의 입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편견과 아집,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세상에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카웃의 성장을 통해서 차분히 보여준다.

과거 미국 남부의 여러 주에서 흑인은 공공건물을 드나들 때 백인이 이용하는 문이 아닌 다른 문을 사용해야 했고, 심지어 화장실과 음수대도 흑백이 나뉘어 있었다. 흑인은 버스, 기차의 뒷좌석에만 앉을 수 있었고 그것도 백인이 오면 양보해야 했다.

이는 불과 6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럼에도 까마득하게 여겨지는 건, 차별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 덕분에 여러 제도가 변했기 때문이다. 미국만 그런 게 아니다. 내 이웃집 여인 중기댁 엄니의 삶을 보자.

엄니는 팔순이 넘었다. 일제시대 때 지금 사는 마을에서 태어나, 청소년기에 이 마을에서 한국전쟁과 빨치산을 겪고, 마을 오빠랑 결혼해, 이 마을에서 자식 여덟 명을 낳고 키웠다. 이제는 노인이 된 마을 오빠랑 동네 경로당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게 엄니의 일상이다.

동네 오빠랑 평생 같은 마을에서 살았지만, 엄니가 관통한 시대는 스펙터클했다. 엄니가 살던 초가집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힌 그 시절의 대통령은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는데, 어느새 그 딸이 대통령이 됐다. 이 지역에서 ‘슨상님’이라 불리던 분도 그 자리에 올랐었다. 부침을 겪었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엄니의 민주주의는 조금씩이라도 커졌다.

미국의 역사처럼, 저절로 그냥 좋아진 건 아니다. ‘패배하는 싸움’에 돌진하는 사람들에게 의해서 세상은 조금씩이라도 달라졌다. 중기댁 엄니는 끝내 넘어오지 않았지만, 나는 계속 OO당을 지지할 생각이다. 그 정당은 이번에 1% 미만의 지지를 받았다. <앵무새 죽이기>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수백 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려는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없으니까.”


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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