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칼럼

지리산 흑돼지보다 맛있는 책, 있다!

by 인터파크 북DB
2016042910020981.jpg


지리산 피아골로 내려올 때 생각했다. 책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겠다고 말이다. 일종의 다짐이었다. 여기에 산 지 이제 1년. 이쯤 되면 뒤를 돌아보기 마련이다. 현대인은 대개 1년 단위로 계획을 세우고 평가하니까. 정리하면 이렇다.


‘모든 게 돼지로 시작해 돼지로 끝났구나.’

여기에 살다 보니 자연스레 손님이 많이 찾아온다. 그들은 그냥 오지 않는다. 꼭 돼지고기를 사온다. 야외에서 고기 구워먹기, 많은 도시인의 로망 아닌가. 어쩌면 고기 구워먹기는, 사냥해온 짐승을 모닥불 위에 올려 놓고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뜯고 씹고 맛보고 즐기던 고대시대 때부터 인간의 DNA에 각인된 선조들의 유산인지 모른다.

손님이 두툼한 삼겹살이나 목살을 사오면 나는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활활 타오른 불이 붉은 숯을 남기면 대형 삽 위에 고기를 올린 뒤 아궁에 넣는다. 일명 ‘아궁이 삼겹살’이다. 삼겹살이 삽 위에서 ‘치지직…’하며 요란하게 익으면 손님들의 입에선 ‘우와!’하고 요란한 탄성이 터진다. 고대의 우리 선조들도 이런 탄성을 지르며 불 위의 짐승이 익어가는 모습을 바라 봤으리라. 고기가 다 익으면 손님들이 먹기 좋게 잘라 준다. 이로써 나의 작업은 끝난다.

모든 일을 마치고 책상으로 돌아가 책을 읽으려 돌아서는 순간, 손님이 외친다.

“고기 좀 같이 드세요!”

그래, 말이라도 그렇게 하는 게 고대부터 변치 않는 인간의 예의 아닌가. ‘두어 점만 집어 먹고 책이나 읽어야지’ 다짐하며 손님상에 앉는다. 술도 한두 잔 마신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취하고, 얼마 후면 나는 책상이 아닌 방바닥에 누워 자고 있다. 이런 사이클은 1년 내내 반복됐다.

남들은 지리산에 살면 몸에 좋은 나물과 약초를 약이 섭취할 거라 생각한다. 물론 그런 사람도 많겠으나, 나는 삼겹살을 가장 많이 먹었고 두 번째가 목살이다. 어느 달에는 주말 내내 손님이 왔고, 그때마다 삼겹살을 굽고 먹었다. 도시 살 때보다 돼지고기를 더 많은 먹은 듯하다. 1년간 읽은 책의 무게보다 내 입으로 들어간 돼지고기가 훨씬 무거울 거다.

<그녀는 왜 돼지 세 마리를 키워서 고기를 먹었나>는 최근 찾아온 손님이 추천해줬다. 그 손님 역시 많은 삼겹살과 목살을 사왔으며, 그 많은 걸 다 먹고 돌아갔다. 살면서 이 정도 돼지고기 먹었으면, 저런 책 한 권 정도는 읽어줘야지 하는 마음을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했다.

제목 그대로 일본의 르포 작가 우치자와 쥰코가 오직 먹겠다는 이유로 돼지 세 마리(작가가 애완동물처럼 ‘유메' ‘히데’ ‘신’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를 직접 키우고, 끝내 죽이고 먹은 이야기. 지리산 흑돼지 삼겹살보다 고소하고, 풍미가 깊은 놀라운 책이다.

돼지를 키우기 위해 시골 폐가를 구하고, 돼지 우리를 만들고, 어린 돼지를 분양받아 키운 뒤 도축장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본 후, 그 고기가 된 돼지를 씹는 우치자와 쥰코. 엊그제까지 자신에게 어리광 부리던 그 돼지가 입 속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울컥하고 말았을까? 천만의 말씀! 그랬으면 결코 지리산 흑돼지보다 맛있는 책이 되지는 못했을 터. 작가는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유메, 히데, 신 세 마리의 등심 슬라이스를 그 자리에서 구웠다. 우리 집 마당에 있는 파란 유자나무에서 따온 유자 슬라이스를 곁들였다. 이 나무 주변에는 세 마리의 똥을 많이 파묻었기 때문에 그 열매에도 세 마리의 뭔가가 들어있을 것이다. (중략)

씹는 순간 육즙과 지방이 입안에 퍼졌다.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고 달콤한 지방의 맛이 입에서 몸 전체로 전해졌을 때, 가슴에 코를 비비며 어리광을 부리던 세 마리가 내 안에서 되살아났다. 그들과 뒤엉켜 장난을 쳤을 때의 달콤한 기분이 그대로 몸 속으로 스며 들어왔다. 돌아와 주었구나!


르포 작가답게 개인 경험담만 쓰지 않았다. 우치자와는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의 도축장을 직접 취재했고, 동물이 죽어 고기가 되는 과정을 수없이 지켜봤다. 뿐만 아니라, 책에는 저자가 직접 지켜본 돼지 교미 모습, 출산 과정, 수컷 돼지 거세 과정 등이 자세하게 나온다.

개인 경험에서 나온 육식에 대한 성찰과 대형 축산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통찰, 여기에 작가의 취재와 공부가 낳은 정보가 잘 버무려졌으니, 그야말로 ’돼지고기 한상 차림’ 같은 책이다. 돼지 세 마리에서 이토록 재밌고 의미있는 글을 길어낸 걸 보면, 정말 일본과 일본인들은 디테일에 강한 것 같다. 잘 익은 삼겹살을 씹었을 때 입에 확 퍼지는 돼지기름처럼, 질투와 부러움이 온몸으로 번지는 기분이다.

지난 1년간 지리산에서 읽은 책 중에서 뭐가 가장 좋았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그녀는 왜 돼지 세 마리를 키워서 고기로 먹었나>를 꼽겠다.

지리산에서 1년, 정말이지 돼지로 시작해 돼지로 끝나는구나.



글: 박상규(칼럼니스트)


북DB 기사 더 보기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