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카오스재단 김수현 팀장
* 이 글은 영화 '그녀에게'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그녀에게' 알리샤는 일상으로 돌아갔을까?
영화 '그녀에게'는 사랑의 기적과 집착, 슬픔을 함께 보여주는 영화다.
우연히 무용수 알리샤(레오노르 발팅 분)를 본 남자 간호사 베니그노(하비에르 카마라 분)는 짝사랑에 빠져 알리샤가 식물인간 상태가 되자 그녀의 담당 간호사로 자원한다. 그는 매일 그녀의 몸을 닦아주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준다. 그리고 반응이 없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만약 알리샤가 들을 수 있다면 그녀는 베니그노의 목소리 덕분에 덜 고통스럽게 식물인간 상태를 견뎌냈을 것이다.
식물인간과 뇌사 상태는 어떻게 다를까. 잠깐 네이버 백과사전으로 찾아보면 이렇다.
'식물인간 상태는 심장정지 등의 원인에 의해 심한 저산소성 뇌손상을 받은 환자들이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지속적으로 생존하는 경우를 말한다. 심한 뇌손상을 받은 환자가 즉시 사망하거나 뇌사 상태에 빠지지 않았다면 수 주일 동안 깊은 혼수상태에 있다가 눈을 뜨게 된다. 환자의 각성 상태는 정상이고 수면각성 주기도 유지되며 자발적으로 눈을 뜨지만, 의식의 내용이 전혀 없어 주위의 자극에 대하여 반응이 없다. 식물인간 상태는 뇌 중에서 대뇌의 전반적인 손상에 의해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 뇌사 상태는 대뇌를 포함하여 뇌간(숨골, 뇌줄기)까지 비가역적인 손상을 받아서 발생한다. 따라서 식물인간상태에 놓인 환자는 인공호흡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호흡중추는 뇌간에 있기 때문), 적절한 음식물을 공급하고 욕창, 요로감염 등의 합병증이 발병하지 않도록 주의하면 비교적 장기간 생존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 '그녀에게'의 한 장면. 왼쪽이 알리샤와 베니그노.
대뇌 전반적인 손상으로'혼수상태'처럼 살아있지만 외부 자극에 반응이 없는 상태가 식물인간 상태다. 만일 연인이 내 말에 반응이 없는 식물인간이 되면 나는 그를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영화에는 베니그노와 비교되는 한 남자가 나온다. 여자 투우사를 사랑했던 기자다. 하지만 그는 연인이었던 투우사가 식물인간이 된 후 크게 좌절하고, 연인을 떠난다. 내게 미소를 보내던 연인이 반응 없는 식물인간 상태로 오래 있다면 견뎌낼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베니그노는 달랐다. 그는 알리샤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 굳게 믿는다. 알리샤를 향한 그의 행동은 집착에 가깝다. 결국 베니그노는 선을 넘어버린다. 식물인간 상태의 알리샤를 범한 것이다. 그는 구속되고, 더 이상 알리샤를 만나지 못하는 슬픔에 자살한다.
그런데 베니그노가 구속된 후 '기적'이 일어난다. 알리샤가 깨어난 것이다. 영화의 종반부 알리샤는 일상에 적응해 나간다. 베니그노의 존재를 모른 채.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알리샤는 무용극을 보러 갔다가 베니그노와 친하게 지냈던 기자(투우사의 연인)을 만난다. 둘은 마치 전에 만난 적(알리샤가 식물인간 상태일 때 병원에서 베니그노를 통해 둘은 만났다)이 있는 것처럼 진한 눈빛을 교환한다.
영화 '그녀에게'의 한 장면.
잔향이 남는 영화다. '사랑은 기적이구나', '집착은 파멸을 부르는구나', '짝사랑은 할 게 못 되는 구나'... 그 무엇을 느끼든 간에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해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영화다.
그런데 뇌과학자인 강연자 김종성 교수(서울아산병원 뇌졸중센터 소장)를 통해 영화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새로운 점이 보인다. 이 영화에 깊은 애정을 가진 이라면 그 애정에 살짝 금이 갈 수도 있다.
알리샤는 식물인간 상태다. 그는 오랜 기간 누워있었다. 식물인간 상태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뇌 전반에 손상이 일어나 있다. 김종성 교수에 따르면 오랜 기간 누워있다 회복되었을 때 알리샤처럼 종전의 생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한다. 깨어나기도 힘들지만 깨어났더라도 이미 뇌 손상이 크게 일어나서 일상으로 돌아가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김종성 교수의 말처럼 사랑의 의미를 알리기 위한 감독의 장치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강연에선 많은 이들이 아끼는 또 한 편의 명작 '메멘토'에 대해서도 검토했다. 주인공 레너드는 아내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본 충격에 10분 만을 기억한다. 그래서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 생길 때마다 잊지 않기 위해 온몸에 문신을 새긴다.
영화 '메멘토'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기억저장소인 해마라는 부위가 필요하다. 그런데 해마는 대뇌 측두엽 안쪽에 꽁꽁 싸여 있어서 정신적인 일로 해마까지 충격받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해마가 충격을 받았다면 다른 뇌 부위도 크게 손상되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영화 속 레너드는 다른 인지 기능은 정상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도 과학적으론 말이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설령 몇몇 부분이 비과학적일지라도 영화적 완성도를 해치지는 않는 것 같다. 놀란의 영화 속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는 '메멘토', '인셉션'처럼 뇌 관련 영화가 많고, 또 하나는 주인공의 부인이 모두 죽어있다는 사실이다. 부인의 죽음이라니, 그의 무의식의 반영일까.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 포스터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의 손예진의 눈빛도 언급되었다. 치매 환자가 그리 초롱초롱한 눈빛을 지을 수는 없다고 한다. 사실 손예진이니까 무슨 병에 걸려도 예쁠 것 같지만 김종성 교수는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라면 먹고 갈래요?'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등의 유명한 대사를 남긴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할머니가 했던 '떠나간 여자와 버스는 잡는 게 아니다'라는 명대사도 언급되었다. 이것은 차원 높은 비유라 치매 할머니가 이런 비유를 들기는 어려울 것이란다. 비유는 가장 고차원적인 뇌 부위를 쓴다. 어머니가 썰렁한 비유를 들어 농담을 하면 '아직 우리 어머니 뇌가 건강하구나'라고 생각하며 크게 웃어드려야겠다.
영화 '지난 여름 갑자기'의 포스터
강연이 끝나고 가장 인상에 남았던 영화는 전두엽 절제술을 다룬 영화 '지난 여름 갑자기'다. 전두엽절제술은 알코올로 뇌세포를 파괴하거나 메스로 뇌 연결 부위를 잘라내는 수술이다. 당시엔 이 수술을 하면 난폭했던 사람이 얌전해진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수술을 받은 이들은 감동이 없고 의지가 없으며, 주변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한 마디로 폐인이 되는 것이다. 전두엽은 강연자에 의하면 '가장 인간다운 뇌 영역'이다. 인간의 논리 및 감정을 조화롭게 하며 자신의 행동에 최종 명령을 내리는 곳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겐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그런데 어이없는 사실은 이 수술을 개발한 모니즈가 1949년 노벨상을 받았다고 한다. (다행히 현재 이 수술은 모든 나라에서 금지되었다.)
지난주는 정신의학을 다루더니, 이번 주는 영화를 다루었다. 대중들에게 융합 영역을 알려주기 위해서 여러 분야를 준비했는데 문제는 패널 섭외였다. 과학이 아닌 다른 분야 패널을 섭외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선뜻 참여해준 '씨네 21'의 장영엽 기자님과 지난 주 패널로 참여해준 서울대 철학과 김기현 교수님, KIST 정두석 박사님께 평생 감사드린다. 물론 인문학과 융합된 강연을 해줄 수 있는 뇌과학계의 귀한 두 분 김종성, 강웅구 교수님께도.
출처
KAOS ‘뇌’ 강연 중 6강 '영화로 만나는 뇌과학'
책 「영화를 보다」 (김종성 저, 동녘)
강연자 : 김종성(서울아산병원 뇌졸중센터 소장)
패널 : 장영엽(씨네21 기자)
사회자 : 김철훈(연세대 의대 교수)
강연 영상 : 카오스재단(http://www.ika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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