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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칼럼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미친 놈'의 말

by 인터파크 북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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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으로 내려와 새삼 알게 됐다. 꽤 많은 사람이 가슴속에 사표를 품고 산다는 걸 말이다. 삶의 꿈이나 계획, 지금 당장 행복해지는 일을 생각할 겨를은 없어도, 다들 하루에도 몇 번씩 사표를 곱씹고 있었다.

지리산에 든 이후 사직을 고민하는 지인의 연락을 자주 받는다. 그들은 지치고 힘들다고, 행복하지 않다고, 전화기 저편에서 자주 한숨을 쉰다. 지리산 도사도 아닌 내게 삶의 고통을 줄여주는 처방전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푸념이라도 하고 싶어서 연락했다는 걸, 그렇게 푸념이라도 해야 숨통이 트인다는 걸, 잘 안다.

이들의 현재는 나의 과거인데, 그걸 왜 모르겠나. 나 역시 "퇴사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고도 오랫동안, 무려 10년이나 회사에 다녀 후배들에게 "선배, 도대체 언제 그만두느냐"라는 타박(?)을 듣기도 했다. 끝내 강한 척 사표를 냈지만 내게도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다.

지리산은 내 학연, 지연, 혈연과 관련이 없는 땅이다. 스무 살 시절에 지리산을 좋아했고, 그때 막연히 ’구례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마흔이 된 나는 그 생각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아무 연고도 없는 지리산으로 내려왔다. 내가 이런 내력을 밝히면 마을의 주류인 칠팔십 대 여인들은 말한다.

"단단히 미쳤구만!"

마을 여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사실 회사에 남는 것도, 회사를 떠나는 것도 미친 짓처럼 여겨졌고, 나는 그 진퇴양난 속에서 후자를 선택했을 뿐이다. 사실 인간의 역사에서 보편적인 길이나 주류의 길을 벗어나는 사람은 ’미친 놈’ 취급을 받았다. 그 낙인효과는 결코 가볍지 않아 대개의 사람은 다른 생각, 다른 선택을 하는 걸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러했고, 그 공포를 줄이고자 선배(?)들에게 의지했다. 그것은 <돈키호테> <마당을 나온 암탉>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이 믿는 길을 선택하고, 뜻대로 그 길을 걸어가 생을 완성한 존재들. 모두 퇴사 이후에 집중적으로 만났는데, 특히 <돈키호테>가 강한 인상을 남겼다.

돈키호테는 "어떤 때는 신중한 사람으로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바보 멍청이는 아닌지 생각하게 되며, 그를 사리 분별이 있는 자와 미친 자 사이 어디쯤에다 두어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는 그런 인물이다.

불의를 바로잡고 가여운 자를 보호하는 편력기사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믿는 ’광인’ 돈키호테는 세상을 떠돌며 온갖 기행으로 고생을 자초한다. 자신의 종자 산초 판사는 물론이고 여러 사람이 뜯어 말려도 그는 자신의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책을 읽다가 ‘돈키호테는 도대체 왜 이럴까’ 하는 생각과 함께 "왜 이런 ’미친 놈’ 이야기가 수백 년 동안 인류가 읽어온 걸작이라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나는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낸 <돈키호테>를 읽었는데 1, 2권 분량을 합치면 약 1700페이지에 이른다. ’광인’ 돈키호테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기행은 재미와 흥미를 주지만 다소 지루하기도 했다.

우리는 의미 없는 고통 속에 살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돈키호테가 최후의 결투에서 패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대목에서부터 기분이 좀 복잡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돈키호테의 다리를 붙잡고 "그렇게 집으로 가지 말고 모험을 계속해 달라"고 떼쓰고 싶기도 했다.

집에 도착한 돈키호테는 남들이 바라는 대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산다. 편력기사라는 믿음을 버리고,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며, 스스로를 그렇고 그런 심약한 노인으로 여긴다. 그 순간 돈키호테는 삶의 의지를 잃고 병을 얻어 끝내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돈키호테는 비록 광인 취급을 받았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완성하기 위해 세상 끝까지 달려간 인물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믿음과 꿈의 실현이었다. 두려움을 떨치고 자기 믿음과 의지대로 살아간 인물, 돈키호테가 인류에서 수백 년을 버틴 이유일 것이다.

밀양에서 국어교사를 했던 이계삼씨는 과거 한겨레 신문에 쓴 칼럼에서 "극심한 고통은 참을 수 있지만, 의미 없는 고통은 참을 수 없다"고 쓴 적이 있다. 지금 나의 여러 지인은 ’극심한 고통 vs 의미 없는 고통’ 속에서 사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러면서 불안을 달래고자 자기계발 서적이나, 창업 관련 책을 뒤적이고 있다. 눈은 자꾸만 통장 잔고를 쳐다본다.

그들에게 내가 읽은 <돈키호테> <마당을 나온 암탉> <그리스인 조르바>를 추천한다. ’의미 없는 고통’을 끝내는 건 자기계발이나 재테크가 아니다. 사실 이 땅에서 가장 좋은 재테크는 그냥 다니던 회사 계속 다니며 다달이 주는 월급 잘 관리하는 것이다.

사직서를 만지작 한다는 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다는 뜻일 게다. 이때 필요한 건, 행복해지기 위해 과감히 닭장을 탈출한 암탉, 믿는 대로 자기를 밀고 나간 돈키호테, 하고 싶은 일은 끝내 하고야 마는 조르바, 바로 이들의 자유로운 감성이다. 그런 감성은 재테크로 충전되지 않는다. 일찍이 광인 돈키호테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이 한가한 생활을 되도록이면 빨리 그만둘 생각일세. 난 이런 생활을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기 때문이라네."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이 늘 같은 상태로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오."

우리는 의미 없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 건투를 빈다.


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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