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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칼럼

여자들이 접수할 지리산, 먼 미래가 아니다

산골독서가의 세상읽기

by 인터파크 북DB


“근데, 옆방 여자는 어쩌다 혼자 지리산에서 사는 거야? 난 그게 더 궁금하네.”


2주 전, 이 칼럼에서 쓴 ‘이웃집 여자와 공포의 밤’(칼럼 보기)을 읽은 몇몇 지인이 내게 물었다. 소설 <7년의 밤>보다 그 여자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았다. 특별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 시선이자 괜한 관심(?)이다.


남자가 산에서 혼자 살면, 그럴 수도 있는 당연한 일로 여긴다. 하지만 여자가 혼자 살면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말 못할 역사가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남자와 다르지 않은 이유로 산에 들어왔어도, 여자는 자기 앞에 던져진 괜한 질문과 오해를 더 자주 마주한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이 산골에서도 강력하게 작동한다.

옆집 여자는 학연, 지연, 혈연 등 지리산과 아무 연결고리가 없다. 그녀는 서울 출생이고, 등산 마니아도 아니다.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은커녕 두어 시간 산책하듯 걸으면 닿는 피아골산장에도 가본 적 없는 사람이다.

초가을이면 피아골의 밤을 수놓는 반딧불이도 옆집 여자는 한 번도 못 봤단다. 반딧불이가 애써 그녀의 집 주변만 피해 날아다닐 리 없다. 캄캄한 밤에는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기에, 검은 밤 반짝이는 반딧불이를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산나물 채취 등 수렵, 채집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옆집 여자는 지리산에서 흔해도 너무 흔한 취나물, 쑥부쟁이도 가려내지 못한다. 곰취, 머위, 아욱의 미세한(?) 차이를 여전히 모른다.

최근엔 낚시를 가르쳐달라기에 집 아래 냇가로 함께 내려갔다. 낚시 시범을 보이려는 순간, 뒤쪽에서 지리산 반달곰이 물고기 사냥을 위해 물에 뛰어든 것처럼 ‘풍덩’ 소리가 크게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반달곰이 아니었다. 옆집 여자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물 밖으로 나온 그녀의 무릎과 정강이에는 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럼에도 낚시를 배우겠다고 한동안 계곡을 걸어다녔다. 언젠가 그녀에게 왜 여기에서 사느냐고 물은 적 있다.

“왜긴요. 아들 시골 작은 학교에 보내고 싶어서 왔죠. 초등학생 아들이 여길 참 좋아하는데, 가만 보면 제가 더 좋아하는 거 같아요. 서울에서는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앞만 보고 살았고, 앞만 바라봐서 행복하지 않았거든요. 근데 여기는 하늘, 땅, 동서남북 사방팔방을 다 보게 되고 또 잘 보여요. 하루하루 날마다 세상이 놀랍고 달라 보여요. 남편은 서울에서 돈 벌어서 서로 떨어져 사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지리산으로 내려온 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어요.”

옆집 여자의 사례, 전혀 특별하지 않다. 지리산에 혼자 사는 남자들이 우글거릴 거라는 생각, 이거야말로 오해다. 내가 사는 피아골에는 혼자 사는 남자보다 여성 솔로가 더 자주 눈에 띈다. 같은 읍내의 옆 동네에는 여자 혼자 사는 가구가 꽤 많다. 다양한 연령대의 그녀들은 농사짓고, 나무하고, 톱질에 도끼질까지 하며 잘 먹고 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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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나 차별, 기득권 잃어가는 남성들의 마지막 발악일지도


힘세고 강력하며 거친, 빙벽은 물론이고 암벽 타기도 거뜬히 하는 여자들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절대 다수다. 그녀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리산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혼자만 잘 사는 것도 아니다. 구례군에서는 매달 첫째, 셋째 주 토요일에 일종의 플리마켓인 ‘콩장’이 열린다. 전통 오일장에 비할 수 없는 작은 규모지만 귀촌자들이 직접 만든 음식, 수공예품 등이 거래되는 소통과 문화의 공간이다. 콩장은 구례의 여자들이 기획하고 이끌어간다. 지리산에서 글 쓰는 여자들은 <지글스>(지리산에서 글 쓰는 여자들)라는 잡지도 발행한다.

지리산에서 잘 사는 여자들, 특별한 사람들 아니다. 미국 저널리스트 해나 로진이 쓴 <남자의 종말>에 잘 나와 있듯이 여자들은 이미 전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뉴욕은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여자들은 좋은 능력과 성과를 보여준다. 한국의 각종 공채 시험에서 여성은 오래전에 남성을 제쳤다. 공정한 규칙과 조건에서 경쟁했을 때 여성의 성취는 더욱 도드라진다. 어쩌면 최근의 여성혐오나 차별은 조금씩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어가는 남성들의 마지막 발악인지도 모른다.

따져보면, 거대 도시에서 승리한 여성들에게 고작(?) 지리산에서의 삶이 무어 그리 대수일까 싶기도 하다. 세상의 진짜 정글은 산골이 아니라 도시다. 육체적으로 힘이 센 남자가 ‘짱’ 먹던 시절도 지났다. 도시의 승자들에게 산골의 삶은 적응의 문제이지 불가능의 영역은 아닐 거다. <남자의 종말> 후반부에서 저자 해나 로진은 말한다.


역사상 바로 이 순간, 유연한 여자와 뻣뻣한 남자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금세기 동안, 여성은 당대에 맞추어 자신을 바꾸고 다시 뒤바꾸고 때로는 비틀어 버리는 데 능숙함을 증명했는데, 바로 이 유연성과 민첩성이야말로 이 시대 성공의 척도가 되었다. 반면, 남성은 훨씬 더 저항적이고 뻣뻣하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에 국한된 현상일지도 모른다.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이 책에 소개된 이 꺾인 남자들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이 마침내 새로운 유연성을 터득할 거라고 믿는다.


어떤 남자들은 지리산에서 잘 사는 여성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원래 지리산이 음기가 센 산이야! 보통 ‘어머니의 산’이라 불리잖아. 그래서 여자들이 좀 사는 거라니까!”

사람은 궁지에 몰렸을 때 미신이나 점쟁이에 의지한다. 여성의 부흥을 ‘음기’의 발흥으로 보는 건, 아직도 남자들이 세상을 뻣뻣하게 자기중심적으로 본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다. 물론 아직 여자들이 갈 길은 멀다.


세상은 하룻밤 새에 뒤집어지지 않는다. 남자들은 약 4만 년 동안 세상을 지배했고, 여자들은 약 40년 전부터 남자들을 밀어내기 시작했을 뿐이다. 따라서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여전히 장애물이 존재한다.


나는 지리산에 여자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 본다. 주변을 보면 여자들이 더 결단을 잘하고, 과감하게 삶의 방향도 선택한다. 소심하고 유약한 여성은, 남자들의 환상이거나 지나간 시대의 인간 유형일 거다.


우리 동네에는 작은 분교가 하나 있다. 전교생은 20여 명인데, 남자는 다섯 명에 불과하다. 이중 지리산에서 나고 자란 일명 ‘원주민’ 학생은 단 한 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산골 학교에 다니기 위해 도시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다. 딸을 가진 부모들이, 그 딸을 산에서 키우겠다고, 이 깊은 지리산에 들어온 거다. 그 딸들은 계곡에서 무르팍 깨지면서도 굳건하게 살아남아 이 산을 통째로 접수할 거다. 여자 산적이 출몰할 수도 있다. 지리산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지만, 확실히 세상은 변했다.

정말… 지리산은 음기가 센 곳인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뻣뻣한 남자다.


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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