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
* 순수하고 기발한 아이의 마음이 담긴 따뜻한 메시지, 아이 그림을 명화처럼 감상하며 '아이 그림 읽어주는 여자' 권정은의 해설을 들어봅니다. 아이 그림을 통해 아이와 내 자신, 그리고 세상과 다시 나누는 이야기. 이 연재는 권정은 'Art Centre 아이' 원장의 책 <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 내용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 편집자 말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분명히 아이가 아름답고 화려한 여자를 그린 거라고 생각했다. 눈이 공작새 깃털처럼 화려하고 가슴은 살짝 봉긋한 게 외모가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인을 그린 것이리라.
그런데 작가 리엔이 붙인 이 그림의 제목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여자'였다. 그림 뒷면에 아이가 직접 적어두었다. 리엔은 외모가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라 마음이 아름다운 여자를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 속의 여자는 화려하다 못해 요염하기까지 한데 제목은 그 여자의 따뜻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 절로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이 여자는 왜 마음이 따뜻한 여자인 거야?"
그림을 그린 리엔이 대답한다.
"이 여자 가슴이 불룩하잖아요! 그건 그 안에 커다란 하트를 품고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마음이 따뜻한 여자를 그린 거죠."
겉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그 속에 커다란 하트가 들어 있어 가슴이 불룩해진 거라니? 이건 마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코끼리가 들어 있는 보아 뱀 이야기 같다.
그런데 왜 그림 속 여인의 눈은 저토록 화려한 것일까? 단지 화려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뭔가 마법적인 힘을 가진 듯한 눈이다. 마음이 따뜻한 것과 화려한 눈 사이에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얼핏 그림을 보면 봉긋한 가슴보다는 화려한 눈으로 시선이 먼저 간다.
"눈이 이렇게 화려한 건?"
"그건 그 눈이 다른 사람 마음속의 하트를 보기 때문이에요."
"!!!"
세상에, 이 아이는 도대체 어느 별에서 내려온 아이일까.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나는 그날 여덟 살 아이의 이 조그마한 드로잉에서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다.
우리가 누구나 꿈꾸는 그곳은 너무 이상적이어서 마치 판타지 영화 속의 따뜻한 인간들만 사는 별나라 이야기 같다. 그리고 그 세계를 꿈꾸고 그려낸 리엔은 그 별에서 살다 온 공주님처럼 느껴졌다. 그런 세상에서 살던 리엔 공주가 지구에 내려와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려니 자꾸만 자기도 모르게 옛날의 기억을 본능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닐까? 리엔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리엔의 다음 그림을 보면 이런 느낌은 더 강해진다. 곱슬머리의 예쁜 여자 얼굴이 등장하는데, 이번에도 커다란 눈이 아주 인상적이다. 작품 속 그녀의 눈동자 속에 역시 강한 느낌의 뭔가가 표현되어 있다.
"이건 눈동자 속에 있는 또 다른 눈이에요. 창밖을 바라보는 딸의 눈을 엄마가 쳐다보는 눈을 그린 거예요."
눈 속의 눈! 나는 그 순간 어떤 아름다운 시(詩)를 읽은 것보다 더 진한 감동을 받았다. 더구나 딸의 눈을 담고 있는 엄마의 눈이라니! 이 성숙하고 비범한 관찰력을 가진 아이는 정말 판타지나 동화 속에 나오는 세상, 아름다운 눈을 가진 화려한 새들이 날아다니는 천국 같은 곳에서 살다 온 존재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여덟 살 아이의 이토록 독특한 시선에 대한 명쾌한 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세계에 대한 리엔의 기발하고 신선한 시선과 미술적 표현은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나는 리엔의 그림을 만나면서 갑자기 우리 세상에는 그런 아름다움만 존재하는 것 같아서, 최소한 그 따뜻한 세상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지 같아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따뜻한 마음만 가진 사람들의 세상, 서로가 서로를 눈에 담고 사는 세상! 상상만이라도 행복하고 감격스럽다.
여덟 살 리엔의 그림 속에 담긴, 인간 모두가 따뜻함을 가진 이상적인 사회, 서로가 서로의 눈을 자신의 눈에 담고 사는 수준 높은 세상을 우리는 어쩌다 잘난척하는 어른이 되면서 송두리째 잃어버린 걸까.
글 : 칼럼니스트 권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