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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칼럼

20대 후반인데 벌써 노후가 걱정됩니다

원빈 스님의 청춘 고민 상담소

by 인터파크 북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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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대 후반 여성입니다. 향후 몇 년 간 특별히 결혼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대로도 제 삶은 충만하다고 믿으니까요. 다만 걱정되는 건 노후의 삶입니다. 늙어서의 삶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노후에 혼자 사는 것이 너무 외롭거나, 힘든 건 아닐지 우려가 됩니다. 뭐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 무슨 걱정을 하느냐 싶기도 하다가도, 내 인생을 내가 체계적으로 대비하지 않으면 큰 곤란을 겪을지도 모른단 생각도 듭니다. 인생이란 탐험에서 어디까지를 불확실성에 맡겨도 좋은 것일까요? 스님의 지혜로운 답변 부탁 드려요.

—ygygl***님



미래가 걱정된다는 것은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반증입니다. 정말 현재의 삶이 이대로도 충만하다고 느끼시는지, 아니면 이 정도면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하시는 건 아닌지요? 만약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만족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인생이란 탐험은 그냥 불확실성입니다.



준비를 하셔도 그대로 안 되는 게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살겠다’라는 계획보다는 그 불확실성을 즐길 수 있는 자질을 훈련하시는 것이 좀 더 나은 방법입니다. 인생은 파도타기와 같기 때문에 파도를 예측하고 어떻게 대처할지 예측하기보다는 그냥 파도를 타고 노는 자질을 훈련하는 것이 훨씬 즐거울 테니까요!



그 자질을 훈련함에 있어서 동양의 모범 답안처럼 된 인생의 롤모델은 ‘공자’입니다. 공자는 무녀 집안에서 비공식 결혼을 통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태생이 귀하지 않다는 것을 《논어》 속의 공자는 여러 번 인정합니다. 그런 그가 주공의 예를 되살리고 군자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아! 저렇게 사는 것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구나!’



심지어 대성지성문선왕으로 추대될 정도로 큰 존경을 받지만 공자 자신은 정치적 삶에서 그리 성과를 거두지 못했죠. 공자는 군자의 자질인 ‘인(仁)’과 ‘예(禮’)를 배우고 익히기 위해 삶 전체를 투자했습니다. 공자 삶의 시작은 총 세 번으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몸이 태어난 시점이고, 둘째는 정신이 태어나는 시점이고, 셋째는 천명이 태어나는 시점입니다.



공자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길, 15세에 지우학(志于學, 배움에 뜻을 두다)했고, 30세에 이립(而立, 뜻을 확고히 세우다)했으며, 40세에 불혹(不惑, 흔들리지 아니하다)했고, 50세에 지천명(知天命-하늘의 뜻을 안다) 했습니다. 또한 60세에 이순(耳順, 귀가 순해지다)해졌고, 70세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마음의 뜻대로 행해도 도에 어긋나지 않다)했다고 합니다.



몸이 태어난 시점은 1세일 것이고, 정신이 태어난 시점은 삶의 방향성을 결정한 15세일 것이며, 천명이 태어난 시점은 삶의 의미를 알게 되는 50세일 것입니다. 공자에게 있어서 15세 이전의 삶과 50세 이전의 삶, 그리고 50세 이후의 삶은 인생 3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주어진 상황과 삶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자 자신도 끊임없는 변화의 무상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더욱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공자가 군자의 삶을 살 수 있었고, 수많은 제자들을 교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삶을 관통하는 방향성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바다 위에서 15세에 세웠던 지우학(志于學)이라는 나침반을 가지고 삶을 경영했기 때문이죠. 또한 ‘지우학’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호학(好學)이라고 하는 원동력 역시 그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공자가 위대해질 수 있었던 두 가지 무기는 명확한 ‘삶의 방향’과 ‘호학’이라는 자질이었죠.



법우님도 삶의 방향성이 있고,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갖추고 있다면 삶의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20대 후반이라면 이미 지우학에 해당하는 자발적 삶의 방향성은 결정하셨을 것입니다. 만약 결정을 못하셨거나 불확실하다면 아직 정신이 온전히 태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성을 점검해보셔야 합니다.



올바른 삶의 방향성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는데 첫째는 그 방향으로 나아갈 때 삶이 점점 더 가치 있어져야 합니다. 둘째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즐거워야 합니다. 두 가지 모두를 만족시키는 방향이면 금상첨화지만 한 가지만 만족시켜도 훌륭한 방향입니다. 법우님의 삶의 방향은 어떤가요?



공자는 정말 배움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나만큼 아는 사람은 많아도 나만큼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스스로 평할 정도로 그는 호학했습니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할 때 즐겁고 희열이 느껴지는 일이 있으신지요?



제가 법우님한테 제시하고 싶은 삶의 조언은 이것입니다. 끝없는 변화의 무상함을 뚫고 나아가고 싶으시다면 계획보다는 뚜렷한 삶의 방향과 그 방향으로 나아갈 자질을 준비하시라는 것이죠. 두루뭉술한 답변이긴 하지만 계속 생각해 볼만한 문제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방법들은 구체적인 질문을 주시면 또 함께 고민해보기로 하죠. 법우님이 가치 있고, 즐거운 삶의 방향을 결정하시고 나아가실 수 있는 원동력을 찾으시길 기원합니다.


글 : 칼럼니스트 원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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